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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Mar 13. 2024

시인의 마음

<글제 : 나무>


고로쇠 수액 체취가 한창인 계절이다. 그 수액이 뼈에 좋다고 소문이 나서 이른 봄이 오기 시작할 때면 고로쇠나무에서 너도나도 수액을 채취한다. 나무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연결하여 채집 봉투를 매달아 놓으면 나무에서 떨어지는 수액이 거기에 모인다. 수액 채취는 경칩 전후에 주로 이루어지고 고로쇠나무가 많은 지방에서는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몸에 좋다고 하니 앞다투어 수액을 마시고, 수익이 좋으니 무분별하게 나무에 상처를 내며 채취하는 경우도 생긴다.


봄날 나무 수액은 ‘상처의 진물’이라며 고로쇠액을 찾지 말아 달라는 칼럼을 읽게 되었다. 필자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었다. 봄나무의 수액은 사람으로 치면 피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나무뿌리가 땅속에서 수분을 흡수해서 줄기 안으로 올려보내면 나무는 비로소 싹을 틔우고 잎이 무성해지게 된다. 특히 봄에는 겨울 동안 잠자던 나무가 봄이 채 오기 전에 서둘러 체내에 물을 풀기 때문에 수액이 풍부하다고 한다. 나무에 상처를 내면 줄기로 끌어올려지던 수액이 밖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연구원은 “나무의 피와 같은 그 물을 사람들은 귀한 약수라고 벌컥벌컥 마신다.”라며 나무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고 했다. 무분별한 체취를 우려하는 칼럼을 읽으며 수목을 연구하고 늘 꽃을 관찰하는 연구원이라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칼럼에 달린 독자의 댓글이었다. 댓글이라는 것이 대체로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기 마련이지만 정치 기사도 아닌 이런 칼럼에 그렇게 극단적인 댓글이 많이 달린 것은 의외였다. 수액을 뽑았다고 죽지도 않는 나무에 대해 억지 기사를 쓴다는 내용부터 “벼가 아플텐데 밥은 어찌 먹으며, 통째로 잘라내서 굽고, 삶고, 볶은 나물은 마음 아파 어찌 먹나?”라는 말까지. 물론 돈이라면 무분별하게 자연을 훼손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도 일부 있었지만, 많은 댓글이 칼럼 내용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비판했다.


두어 달 전에 일명 ‘개고기 식용 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개고기 식용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었다. 그러다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늘어나고, 동물권 보호 여론이 확대되니 법으로 식용을 금지하게 되었다. 개나 고양이처럼 반려동물들에 대해서는 식용을 반대하지만, 소나 돼지 같은 고기나 생선까지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들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불편한 존재로 인식된다. 생명 존중 사상을 극단적으로 수행하게 되면 세상에 먹을 수 있는 게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강변하기도 한다. 어디까지가 적정한 것인가.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두 마리 사 온 적이 있었다. 옥상에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키웠는데 한 마리는 죽고 나머지 한 마리가 제법 자랐다. 어느 날 엄마가 닭을 시장의 닭집에 가져가 잡아 와서 백숙을 끓였다. 닭이 사라진 것을 알고 백숙을 본 아이들이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자 엄마는 “치킨은 잘도 먹더니만 웬 난리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꺾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꽃다발을 받으면 우리는 좋아한다. 논쟁은 끝이 없으나 명쾌하게 결론을 내기 어렵다.


맹자에 보면 ‘이양역지(以羊易之)’라는 말이 나온다. 제나라 선왕이 맹자를 초청해 가르침을 받을 때 이야기다. 맹자가 ‘재물로 끌려가던 소가 눈물을 흘리자 선왕이 소를 양으로 대체하라고 한 것’에 대해 “왕 노릇 하기에 충분하다.”고 칭찬하였다는 내용이다. 맹자는 “그것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니 소는 직접 보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맹자가 소의 눈물만 측은하다고 생각하고 보지 못한 양의 희생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는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맹자의 구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아닐까. 우리의 마음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관념적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눈앞에서 직접 보고도 그것을 구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비정하다 아니할 수 없다.  


아끼는 마음은 감각으로 인식한 만큼 낼 수 있다. 시대의 고통을 말하고 온 세상을 구원할 것처럼 떠들지만 정작 내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관심을 가지면 마음 주는 것이 점점 넓어진다. 길가에 핀 풀꽃도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된다.’고 시인 나태주는 노래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여삐 보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시인의 마음이 아닐까. 고로쇠나무의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수액을 ‘나무의 피’로 느끼는 수목연구원의 글이 오늘 나에게 시인의 마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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