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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Mar 27. 2024

세월의 향기

<글제 : 여행>


좋은 냄새를 향기라고 말한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냄새는 코로 맡을 수 있는 온갖 기운이며 향기는 꽃, 향, 향수 따위에서 나는 좋은 냄새로 규정되어 있다.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 우리의 코는 온갖 꽃향기로 기분 좋은 자극을 받는다. 남쪽에서부터 매화향이 올라오기 시작한 때 여행을 떠나 이국땅에 오니 목련꽃과 수선화가 한창이다. 거리를 거닐며 꽃향기에 취해보려는데 어디선가 휙 끼치는 생소한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든다. 담배 냄새는 아닌데 묘하게 기분 나쁜 이 냄새는 뭘까. 옆에서 걷던 딸이 대마초 냄새라고 말해준다.


   네덜란드는 대마초 흡연이 자유로운 나라란다. 여행을 계획할 때 나에게 이 나라는 튜울립과 풍차의 나라였는데 막상 와보니 여기는 대마와 매춘, 그리고 안락사가 합법인 나라이기도 하다.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개방적이다. 길거리 흡연이 자유로우니 거리를 걸으며 곁으로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끼쳐오는 냄새를 피할 도리가 없다. 속이 울렁거린다. 심지어는 길거리 가게에서 그냥 대마를 파는데, ‘coffee shop’이라고 써 있는 가게에 커피를 마시러 들어갔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그곳이 대마를 파는 상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커피 파는 가게는 ‘cafe’라고 표시된 곳이다. 담배 냄새가 아니더라도 외국에 나오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체취를 맡기 힘겨울 때가 많다. 한국 사람에게 마늘과 김치 냄새가 나는 것처럼 서양인에게서는 느끼한 버터와 치즈 냄새가 난다. 게다가 이곳 네덜란드에서는 생전 못 맡아본 대마초 냄새까지.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는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게 된다. 멋진 풍경을 즐기기도 하고 다양한 맛과 향의 색다른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도 크다. 다소 비위에 맞지 않더라도 가급적 현지 음식을 먹어보려 애쓴다.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외국여행을 할 때 고추장을 따로 챙겨서 다니기도 한다지만. 이번 여행지인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초코렛과 치즈로 유명한 나라들이다. 가는 곳마다 초코렛이 가득가득 쌓인 상점이 즐비하다. 일단 가게에 들어서기만 하면 전통의상을 입은 직원이 다양한 종류의 초코렛이 들어있는 바구니를 내밀며 시식을 권한다. 입에 사르르 녹는 그 초코렛을 먹어보면 안 살 도리가 없다. 여행을 다니는 내내 가방에 넣고 다니며 먹었더니 입안이 초코렛 향으로 가득하다. 치즈 가게를 들어가면 커다란 호박 같은 치즈 덩어리부터 동전처럼 포장된 치즈까지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다. 치즈 맛을 잘 모르는 문외한임에도 이곳저곳 다니며 계속 시식을 하니 호불호를 말할 정도가 되었다.


   다양한 맛과 향을 즐기며 여행하는 중에 꽃과 음식에서 나는 향기와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치즈와 초코렛, 우유가 맛있지만 이 음식을 먹고 사는 서양 사람들의 체취는 좋아하기 힘들었다. 복잡하고 당황스러운 체취가 나의 후각을 자극한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이기 때문일까. 그 사람들도 마늘과 김치 냄새가 몸에 밴 우리의 체취를 힘들어하겠지. 더러는 체취를 잊게 할 정도로 강한 향을 뿌리기도 하지만 체취와 뒤얽힌 향수는 그 부담스러움이 두 배가 된다.


   여행지라는 특수한 환경에 처했으니 다양한 냄새도 문화의 차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려 애쓴다. 세계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신들의 식문화에 의해 다양한 체취를 내뿜고 나 또한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냄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일주일 정도 지내니 이미 후각이 좀 익숙해진 듯한 기분이 든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부담스러운 냄새가 좋은 향기로 바뀔 때가 있다. 말이 뾰족하고 태도가 단호하여 처음 맡은 대마의 냄새처럼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럴듯한 말로 문제를 봉합하여 버터와 치즈처럼 느끼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무색무취하여 덤덤하게 살다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당황하게 된다. 처음에는 일단 방어적이 되면서 관계 맺기가 주저된다. 그러다가 시간이라는 매개가 작동하여 점점 감각이 무디어질 때쯤이면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차츰 알아갈수록 그 뾰족한 태도는 명쾌함으로 느껴지며 곤란한 순간에 구렁이처럼 담을 넘어가 주는 사람을 만나면 고맙기 그지없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다가, 이 사람은 이런 향기가 있고 저 사람에게서는 저렇게 좋은 냄새가 난다며 받아들이게 된다.


   환갑을 넘어가는 나이가 되어서야 각각의 개성을 지닌 냄새가 좋은 향기로 느껴진다. 젊은 시절의 예민한 후각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수선화의 향기를 즐기려면 알싸한 모깃불 냄새 같은 대마의 냄새도 그냥 스치듯 지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방인의 무리 속을 거닐며 생소한 냄새에 익숙해지게 하는 건 시간이라는 묘약이다. 자연의 향기가 사람의 몸을 통과해 나온 체취이니 그 세월의 찐득함이 어찌 아니 묻어있겠는가. 이 또한 세월의 흐름속에서 취하고 싶은 향기로 누려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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