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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Mar 20. 2024

아낌없이 주는 나무

<글제 : 나무>


   뜻밖의 곳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11시간의 긴 비행끝에. 비용을 줄이려고 환승비행을 택한 우리는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 환승공항에 내려 대합실에서 또 몇시간을 기다릴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카타르의 도하공항이다. 처음 와보는 곳이다. 여권검사를 마치고 공항 대합실로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와우'감탄사를 내뱉었다. 공항 환승 대기구역이 온통 초록이다. 흡사 대형식물원에 들어온 기분이다. 크고 작은 열대식물들로 꽉 들어차 있다. 한바퀴 돌며 풀과 나무들을 감상하고 나무아래 편안히 자리잡았다. 나무와 미니연못, 분수 덕분에 실내공기가 아주 쾌적하다. 여기저기에 승객들이 앉거나 누워서 쉬고 있다. 책을 읽고 있는 귀한 모습도 보인다. 이 먼 이역만리 낯선 나라에서도 나무의 덕을 보다니.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이니 다 돈 덕분이기도 하리라. 그래도 이렇게 공항 내부에 숲을 들이려는 인간의 생각이 신선하다. 어딜가나 나무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만 준다.


   어린 시절 동구밖 큰 느티나무는 우리들의 첫 놀이터 이자 휴식의 장소였다. 키보다 높은 곳에 뻗은 가지에 매달리는 것으로 체력 실험을 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높이 뛰어도 닿을 수 없었던 그 가지는 어른이 되어 찾았을 땐 가슴께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곳에 있었다. 함께 간 막내 아들에게 뛰어 올라보라 했더니 두 발을 깡총거리며 연신 만세를 부르지만 잡기엔 턱도 없다. 놀이터였던 느티나무는 어른이 된 나에게 추억이라는 달콤한 선물도 주었다.


   전학 온 서울의 여학교 교정에는 넓은 등나무 그늘이 있었다. 철재로 탄탄하게 기둥을 세우고 만든 야외 휴게실 지붕은 등나무가 타고 올라 빽빽한 잎으로 햇볕과 비를 막아 주었다. 꽃피는 계절이 오면 보라색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때가 되면 말랑한 총각선생님에게 야외수업을 하자고 졸라댔다. 등나무 그늘은 나의 첫 독서실이자 상상력의 창고였다. 학교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그곳에 앉아서 읽다가 눈이 아슴아슴하게 어둠이 내려서 집으로 돌아간 날이 많았다. 친구가 없던 전학생의 외로움을 감추기 좋은 장소였다.


   뇌의 감성영역이 단단해질 때 나무는 나에게 평온과 설렘을 주었고, 이젠 자기 몸을 바쳐 변신한 책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책 한 권을 만드는데 몇 그루의 나무가 필요할까. 그 수많은 나무들이 온 몸에 빼곡히 글자를 박고 나에게 온 것이다. 숲 속에 오두막을 지은 소로우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유장한 토지의 스토리를 휘몰아치는 여성작가의 글로 찾아오기도 한다. 생각하면 참으로 장대한 일이다. 가치없는 책을 쓴 작가에게 흔히 잘려나간 나무가  아깝다는 말로 비판하기도 한다. 그 말은 책을 읽은 독자에게도 적용되리라. 책을 읽고 실천하지 않으니 생명을 바친 나무만 애처롭다고.


   공항의 대합실에서 예상치 못한 휴식을 즐기며 나무의 유익에 대한 생각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늘 옆에 있으니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던 것들에 대한 감사함까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처럼 나무는 온몸이 잘린 후의 밑동까지 의자로 내어준다. 나무의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엄마의 사랑에 못지 않게 헌신적이다. 관으로 변신하여 인간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동행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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