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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Feb 14. 2024

아름다운 이별

<글제 : 이별>


“요새는 딸을 보내는 것이 아니고 사위를 얻는 거라는데.”

친구들이 한마디씩 하니 혼주인 친구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한다.


“글세? 내 생각에 결혼식은 자식과 부모의 아름다운 이별식인 것 같아”


웃고 떠들던 우리들은 갑자기 저마다의 생각으로 말없이 차를 마셨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자녀의 혼사를 치르며 홍역을 겪는 가정이 많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친정‘이다, ’시댁‘이다 하며 갖가지 의무가 부여되어 신혼의 가정에 새로운 관계의 굴레가 씌워진다. 자녀들 또한 어느덧 양가에 의지하고, 자녀를 키우며 부모에게 당연한 듯 부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각자의 책임하에 가정을 꾸린 후에도 계속 얽혀있다.


우리에게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이 모든 관계들이 아름답게 포장되어왔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조부모와 손자의 관계가 단지 사랑으로만 연결되지 않고 어느 일방에 의해 의무가 될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의무의 관계에서는 약자의 존엄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오랜 가족의 전통 속에서 시부모와 며느리의 관계가 그러했고 양육의 부담을 나누어 가지는 친정엄마의 역할이 또한 그러했다. ’양육‘의 의무로 맺어진 관계는 부모가 늙어갈 때 ’돌봄‘의 의무로 되돌아 온다. 평생을 끊지 못한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미풍양속‘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굴레가 되기도 한다.


가족이 모여 살아야 외부의 공격을 감당할 수 있던 시대가 있었다. 세월이 변하여 삶의 양식이 바뀌고 가치관도 변하였다. 과거에는 당연하던 것이 현재는 피하고 싶은 의무가 되기도 한다. ’전통에 대한 충실성‘과 다양한 가능성을 추구하는 ’개인의 열린 미래‘와의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역할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한때 절절히 사랑했던 연인의 관계도 마음이 변하면 이별을 맞이한다. 시대의 변화에서 서로의 역할이 바뀌는 가족 관계는 마음이 변하는 것보다 훨씬 이별하기 어렵다. 흔히들 ’부부는 돌아서면 남이지만 부모 자식은 영원히 뗄 수 없다.‘ 고 말한다. 그러나 자식도 부모에게서 떼어낼 시기가 온다. 결혼식이 그 좋은 기회이다. 각자 자신의 반려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릴 때 부모는 자식을 영원히 떠나보내면 된다.


페터 비에리는 『삶의 격』에서 '이별은 상대방에게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것'이라는 말로 인간으로서 만남과 이별의 존엄성을 이야기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여기가 아닌 다른 새로운 곳에서, 그의 미래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다면 기꺼이 떠나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부모 자식, 동반자의 변화에 대해 이런 마음가짐으로 임할 수 있을까? 자식의 결혼식을 보며 그와의 영원한 이별을 선언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며느리를 얻고 사위를 얻었다고 기뻐하기 쉽다.


시대가 변하였으니 우연히 나에게 와서 탄생의 기회를 가졌던 그들이 이제 새로운 미래를 찾아 날아간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그들을 나의 울타리에 가두고 빗장을 지르는 대신 자유를 선사하리라. 미래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이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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