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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Aug 28. 2024

빨래

금메달리트스의 빨래이야기

운동선수의 ‘빨래 이야기’가 8월의 열대야를 더 덥게 만들었다.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배드민턴 선수 안세영의 인터뷰 내용에서 발단되었다. 훈련하는 동안 힘들었던 과정과 체육단체 운영의 불합리한 점을 지적한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 인터뷰 이후 언론에서는 후속 기사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온통 지면을 가득 채웠다. 문제의 본질을 지적한 기사도 있었지만, 온갖 가십성 기사들이 난무했다. 그중에 대중들의 말초신경을 가장 쉽게 건드린 것은 ‘빨래 이야기’였다. 


중학교 3학년의 어린 나이에 대표선수가 된 안세영이 거의 7년 동안 일부 선배들의 빨래를 하도록 강요받았다는 내용이다. 가짜 뉴스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유명 배구선수 김연경도 과거 TV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그런 경우를 겪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으니 말이다. 대체로 운동선수들 사이에서는 후배가 선배의 빨래를 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 모양인데, 안 선수는 워낙 어린 나이에 대표선수가 되다 보니 오랫동안 막내로 지내게 되어 더 가혹한 경험을 한 것이리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세계 1위 선수에게 빨래를 시켰다는 사실이 뉴스를 보는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인터넷에서는 군대 다녀온 남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군대 시절 선임 빨래를 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지금은 군대에서도 없어진 악습이라며 여론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안 선수가 제기한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 몇 주간 빨래 이야기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어린 시절 오줌싸개였던 나는 이불 빨래로 엄마를 힘들게 한 괴로운 추억이 있다. 여름에야 얇은 이불이니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겨울에는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솜을 넣은 두툼한 요는 껍데기가 벗겨져 얼룩얼룩한 무늬를 그대로 가진 채 마당의 빨랫줄에 널리곤 했다. 나는 행여 동네 사람들이 볼 새라 얼룩이 길 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빨래를 돌려 널려고 끙끙댔다. 작은 키에 발돋움하여 어찌어찌 내리긴 했는데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엄마에게 엉덩짝을 맞았다. 겨울에도 엄마는 오줌싼 이불 홑청을 벗겨 이른 아침 개울가의 얼음을 깨고 빨았다. 바싹 말린 광목 홑청을 온 방에 깔고 그 위에 오줌 얼룩이 남아있는 솜을 올린 후 가장자리를 한땀 한땀 꿰멜 때 나에게 눈을 흘기곤 했지만,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가 아파서 누워계실 때 하루에 몇 번씩 기저귀를 갈고 음식 흘린 옷을 갈아입힐 때 신기하게도 그것이 더럽지 않았다. 어린 자식의 옷을 빨 때 더럽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랑이고,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겨울 냇가의 얼음을 깨고 이불 홑청을 빨던 마음과 같은 마음. 그러나 원치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의 빨래를 일방적으로 부담한다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함께 하는 공동생활에서 서로의 부담을 나누어질 때와는 사뭇 다르다. 내가 상대에게 부담을 지운 만큼 나도 누군가의 일을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 일을 가볍게 해준다. 일방적인 부담은 누구든 원치 않는다.


늘 바쁜 맞벌이 부부들에게 가사 분담은 상당한 논쟁거리가 된다. 밥은 당연히 아내 몫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청소와 빨래는 남편의 분담으로 돌아간다. 전적으로 전담은 하지 않더라도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너는 것을 도와준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남자들은 많다. 요즘 같은 세상 세탁기가 빨래 다 해주는데 뭐가 힘들다고 그 야단이냐 할 수도 있지만 실제 집안일을 해보면 도상에서 재는 것과는 달리 품과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돌리고 나면 주름지지 않게 탁탁 펴서 건조대에 널고, 다 마르면 하나하나 개켜서 각각 정해진 보관처로 분류하여 넣어야 한다. 건조기를 사용할라치면 빨래해서 말리기까지 기계 앞에 서성이는 게 서너 시간이 걸린다. 어쩌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잊어버리고 시간이 지나면 빨래에 냄새가 나서 다시 헹궈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건조기에 들어가면 안 되는 옷을 돌리기라도 하면 쪼그라든 옷 때문에 일해 놓고 욕 얻어먹는 억울한 신세가 된다. 한두 번 잔소리를 듣게 되면 호기롭게 나서서 가사 분담을 하던 남편은 “아잇 나 안해!”하며 반기를 들고 만다. 아내들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일을 덜기 위해 맘에 안 드는 일 처리에 불만이 있어도 꾹 참는 수밖에 없다. 


배드민턴 선수의 선배 빨래 문제를 다룬 기사의 댓글에는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이 있었다. ‘손빨래하는 시절도 아니고 세탁기 돌릴 때 선배 빨래도 같이 돌리면 되는데 그 쉬운 것도 불만을 제기한다.’라며 후배 선수를 비난하는 댓글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쉽게 돌리면 되는 세탁기를 자기가 하지 왜 후배에게 시키나?’ 하는 비난도 있다. 코미디 같은 이런 이야기가 실제 누군가에겐 스트레스를 넘어 트라우마까지 된다고 하니 웃을 일만은 아닌듯하다. 이건 선·후배 간의 문제뿐 아니라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언쟁이다. 


문제의 본질은 자기 책임감과 상대에 대한 배려심인데 엉뚱하게 빨래가 주역이 된 꼴이다. 비단 빨래만의 문제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서열문화, 남녀의 불평등,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세태 등 모든 문제로 연결된다. 내가 힘들면 상대도 힘들다는 사실, 내가 존엄한 만큼 상대도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이런 문제들이 해결된다. 금메달 딴 선수가 제기하니 빨래 이야기도 톱뉴스가 된다.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동안 말하지 못하던 우리 안의 못된 습관을 하나씩 없애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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