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성웅성 새벽 청소차 소리에 잠이 깬다. 아파트에 살 때는 못 듣던 소리인데 주택가로 이사를 오니 바로 옆에서 작업하는 것처럼 크게 들린다. 더운 여름밤엔 창문을 활짝 열고 잠이 드니, 그 소리가 더 선명하다. 후끈한 공기가 느껴지니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새벽마다 쓰레기 치우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공장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느낌이다. 거실을 둘러보고 아침밥 지을 쌀을 물에 담근다.
팔월 그믐이 지나면서 거짓말처럼 조석으로 소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새벽 여명은 조금씩 늦게 열려 어둠이 가시기 전이지만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깬다. 선선한 바람 덕분에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며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 창을 바라보는 여유를 누려본다. 무더위가 꽁꽁 묶어두었던 생각들을 새벽바람이 풀어 느슨해지므로.
한낮의 외출에서 습관처럼 챙겨 넣던 양산과 선글라스도 이즈음이면 가방에서 넣었다 뺐다 망설이게 된다. 썰렁해지는 저녁 시간을 의식하여 긴소매 옷을 챙겨 들고 나선다. 너무 뜨겁거나 차가우면 감각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음식 간을 볼 때도 따뜻하게 데워졌을 때나 적당히 식었을 때 가장 정확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꽁꽁 언 땅이 녹아내려 부드러워진 연후에야 생명의 약동을 느끼듯이, 이글거리는 태양의 온기가 조금씩 떨어지니 불볕더위에 마비되었던 생각들이 비로소 계절 감각을 회복하는 듯하다.
구월은 생각이 깨어나면서 또한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는 시간이다. 직장에서도 이때쯤이면 여름휴가에서 직원들이 하나둘 복귀하면서 사무실이 북적인다. 하반기 사업이 새롭게 추진되는 시기고 학생들은 새 학기를 시작한다. 상반기에 실적이 부진하거나 성적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면 다시 한번 부활전의 기회가 주어진다. 심기일전해서 다시 시도하는 부서는 부진을 상쇄하고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지만, 이미 망쳤다고 별도리 없다며 포기하면 빈 주머니가 될 수밖에 없다.
인생의 주기를 펼쳐보면 육십이 딱 이 시기이지 않을까. 백 세를 사는 시대이니 이제 삼분의 이 지점을 지나는 때이다. 하던 일들을 잘 마무리하고 갈 준비해야 하는 시기이지만, 한편으론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 남아있다. 인생의 전반전을 마감하고 후반전의 여명이 밝아오는 이 시점은 그 형태가 잡히지 않은 열린 시간이다. 곧 흘러내릴 듯하면서도 완전히 굳어 딱딱해지기 전 살짝 익은 계란반숙처럼. 자유롭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지만 불확실하기에 납처럼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많은 선택지와 가능성이 남아있는 그 시간은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순간이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만족하고 편안한 노후를 누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리라. 그러나 새로운 시도를 하기 전 불안정한 이 시간은 오히려 우리가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때가 아닐까. 인간의 심장이 계속 뛸 때만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순간 평온이 찾아오지만,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어려운 철학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불안을 이겨내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만이 이 순간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리라.
여름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으나 가을은 시작되지 않은 여명의 시간, 아직 어둠은 잠꼬대하는데 심장이 고동치듯 열린 창으로 청소차의 웅성거림이 어김없이 들려온다. 여름내 걷어찬 홑이불을 다시 끌어당겨 덮으며 이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듯 몸을 뒤척인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자기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구월을 속절없이 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