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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Nov 07. 2024

N생을 살 수 있다면

‘N잡러’라는 신조어가 있다. 본업 이외에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N생러’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60세까지를 한 생애로 본다면 은퇴 후에 다양한 삶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새로 태어난 듯이 다방면으로 신나는 경험을 하며 살고 싶다는 은퇴자의 욕망이 담긴 표현이다. 가능하다면 수입도 창출하면서.


‘눈 떠보니 N생러’라는 이름의 커뮤니티 모임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성장하는 어른들의 롤모델이 되자는 모토를 내건 중장년 인생 프로젝트 모임이다. 1960년대에 태어난 소위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직장에서 은퇴하여 사회로 쏟아져 나오는 시기가 되었다. 워낙 많은 수의 인원이 한꺼번에 은퇴자가 되다 보니 중장년의 은퇴 후 삶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직장에서 정년을 맞이하고 은퇴 후에는 편안하게 운동이나 여행을 즐기고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 노년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평균수명이 늘어나게 되자 환갑은 은퇴를 논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가 되고 말았다. 퇴직 이후에도 건강하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들은 새로운 활동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커뮤니티에 참여한 사람들은 저마다 특색있는 중장년의 삶을 누리며 살고 있다. 공공기관을 퇴직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전시회를 열고, 그림책 작가로 새로운 삶도 모색하는 분이 있다.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시간의 축적이 오롯이 들어있는 신선한 그녀의 그림은 동료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시민단체에서 정년을 맞이한 여인은 문학소녀의 꿈을 새롭게 갈고 닦아 백일장 대상을 거머쥐고 책을 펴냈다. 디지털 기능을 익혀 스스로 책 표지를 디자인하고 포털사이트에 인물 등록을 완료했다고 한다. 은퇴 후에 자신의 존재감을 새롭게 찾은 두 분의 반짝이는 눈을 보니 N생이라는 것도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에서 사진을 찍는 여인이 있다. 신부님의 일정에 동행해 행사 사진을 찍고, 각종 모임에 사진 봉사활동을 하며 매사에 감사하며 사는 아름다운 분이다. 이분이 어느날 그동안 고사하던 사진집을 냈다고 출판기념회를 했다. 자랑스러워하는 딸의 모습을 보고 새로운 길에 나선 자신의 선택에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이제 누구도 그녀의 행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또다시 스스로 제작한 책을 출판하겠다고 도전했다. 느린 자판 타이핑 속도 때문에, 음성녹음을 문자로 변환하는 디지털 기술을 익혀 책을 쓴다. 그녀만의 시선으로 찍은 사진은 커뮤니티 구성원들에게 완벽한 추억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제 어디 있을지 모르는 새로운 독자를 찾아 길을 나선 것이다.


N생을 살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주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게 되니 매 순간이 행복하다고. 생계를 책임지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지낸 시간의 무게를 견뎌낸 사람들이다. 이제야말로 자신이 인생의 CEO가 될 차례라고 외친다. 누가 시키는 일이 아닌 나 자신이 기획한 일, 나의 내면에서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의 즐거움이라니. 그 일이 쉽다는 말은 아니다.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것을 첫발부터 스스로 터득하며 나아가는 길에 어려움이 왜 없겠는가. 출판 마감에 닥쳐서 밤새워 끝도 없이 글을 고치고, 떠오르지 않는 생각들을 긁어모은다. 글감을 찾아 헤매면서 ‘내가 무슨 영광을 바라고 이걸 하고 있나’하는 자괴감이 생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고 끝에 태어난 자기 작품을 받아 들고 나면 언제 그런 고난이 있었느냐는 듯 환하게 밝아오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살아가며 가장 중요한 가치가 뭐냐고 묻는다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자유’라고 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선택하여 태어난 삶은 아니지만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땅을 딛고 서기 원했다.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때로 원하는 데로 살 수 없는 순간도 있었겠지만, 끊임없이 그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한 발씩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몸이 구속되어 있다면 기어이 그 정신을 밖으로 내보내서라도 자유로워지고자 몸부림쳤을 것이다. 악마의 섬 감옥에 수용되어 있던 빠삐용이 살 수 있다는 아무런 담보도 없던 그 섬의 절벽에서 뛰어내려 탈출하던 순간처럼.


너무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닐 수도 있다.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고통으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그러나 살아있는 순간 늘 성장하면서 새로움을 모색하는 삶이 가치 있다. 자유로운 선택이 인간의 존엄이라면, 하고 싶은 일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하며 살 수 있는 삶은 더 매력적이다. N생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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