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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Jun 19. 2019

욕하는 할머니와 영리한 아이들

아침에 일어나서 뭐가 불만이신지 기둥을 탕탕 친다. 김밥을 말고 있어서 "잠깐만 기다려! 엄마 혼자 일어날 수 있잖아. 일어나 나와요." 부엌에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한참있어도 안나오고 점점 큰소리로 두드린다. 하는수 없이 손을 닦고 들어갔다. 화가 나셨는지 들여다보는 내 뺨을 찰삭찰삭 때리신다. '니가 내 답답함을 알기나하냐?' 그런 뜻이다. 웃으며 장난을 치니 샐쭉하며 화를 거둔다.


꼬마가 사투리를 실감나게 구사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배웠기 때문이다. 동네 어른들은 사투리 쓰는 꼬마들이 귀엽다고 자꾸 말을 시켰다. 둘째는 태연하게 할머니 말투를 똑같이 흉내내서 더 귀염을 받았다. 막내는 처음 말 시작할 때부터 존대말을 썼다. 쪼그만 꼬마가 반듯하게 존대말을 쓰니 골목 어른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런데 엄마는 욕을 잘했다. 요즘 지상에 오르내리는 그런 쌍욕은 아니지만 듣기 민망할 때가 많았다. "망할 년" "도둑놈의 새끼" "문디자식" "지랄한다" 등등 어찌보면 조금은 정겹지만 막상 서울사람들 앞에서 엄마가 그 말을 할 때 나는 너무 창피했다. 제발 욕좀 하지 말라고 하면 "미친 년 내가 언제 욕을 했다고..." 하신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이들이 배울까봐 늘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사투리는 자기도 모르게 툭툭 내뱉었는데 욕은 한 마디도 배우지 않았다. 가끔은 할머니에게 매도 맞았지만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도 "아이 씨~" 정도의 반항밖에 하지 않았다. 할머니때문에 미치겠다는 말을 할지언정 할머니의 욕은 한 마디도 따라하지 않았다. "부모의 말이 자식에게 文書다"라는 말을 소개하는 글을 읽었다. 부모역할을 하던 할머니의 욕을 아이들이 배우지 않은 비결은 뭐였을까?
 
"어린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도 있다. 천지도 모르는 것 같아도 아이는 말을 하는 부모의 마음가짐과 애정의 정도를 아는 것 같다. 겉으로 내뱉는 욕이 할머니의 마음가짐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음이 분명하다. 그 말은 오랜 세월의 질곡을 견딘 할머니만의 표현방식임을 그 말투나 표정에서 전달받았을 것이다. 그 사랑 어린 눈빛과 진심으로 하는 걱정을 아이들이라고 왜 몰랐겠는가?
 
이제 엄마는 욕을 못한다.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면 막대기로 기둥을 빠르게 탕탕탕 칠뿐이다. 거칠지만 정겨웠던 엄마의 욕이 그립다. "미친년 남사스럽게 별소릴 다하고 자빠졌네!"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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