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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Jun 21. 2019

가슴에 추억이 차곡차곡 담기니 늙어가는 게 분명하네

늦은 시간 퇴근하니 할머니 돌보미로 불려온 큰 딸이 거실에 꼬부리고 자고 있다. 엄마는 현관 문소리에 벌써 일어나 앉고 있다. 옷 갈아 입으려고 작은 방으로 갔더니 창문밖으로 두런 두런 사람들 소리가 난다. 고요하던 아파트에 사람소리 들리니 재활용 수거일이다. 목요일만 되면 아파트 1층 우리집 창문밑에 있는 재활용 분리장은 밤 늦도록 시끌시끌하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재활용품을 들고 나간다. 지난주 수거일을 놓쳤더니 현관앞이 패트병과 비닐봉지로 수북하다. 요즘은 1회용으로 포장된 음식재료를 많이 활용하니 버리는 쓰레기도 많다. 튼튼한 용기들이 버리기 아까울 정도이다. 가능하면 이것저것 담아놓는 용도로 활용하지만 그것도 쌓이니 살림이 늘어나서 이제는 아깝지만 버린다. 참기름병을 보니 밑에 검은 찌꺼기들이 남아있어 하수구에 버려야하나 고민하다 이번주에도 못버리고 또 창틀에 올려뒀다.

멀쩡한 통들을 버리면서 없이 살던 어릴적 생각 한 꼭지가 떠오른다.


초등학교1학년 때였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춘삼월 지나 봄이 성큼 우리 곁에 와있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산길을 혼자 터덜 터덜 걸으며 보니 길옆으로는 참꽃들이 연분홍빛으로 여릿여릿하게 피어 있었다. 약간 시큼한 맛이 나는 꽃잎을 입술이 보랏빛이 되도록 따먹으며 집으로 가고 있었다. 꽃송이 여러개가 소복하게 매달려 유난히 탐스러운 참꽃가지 몇 개를 골라 꺾었다. 집에 오자마자 툇마루에 꽃가지를 놓고 꽂을 병을 찾았다. 부엌이며 마루, 방을 다 뒤졌으나 빈병이 없었다. 유리든 프라스틱이든 통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부엌 찬장 미닫이문을 여니 작은 양념항아리 빈 것이 하나 있었다. 깨끗이 씻어 꽃을 꽂았으나 입구는 너무 넓고 바닥은 얕아 꽃이 사방으로 흩어져 넘어진다. 양념항아리를 있던 곳으로 다시 넣다가 찬장구석에 거무스름하게 썩은 액체가 반쯤 들어있는 파란 소주병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뛸 듯이 기뻤다. 마당가 수채구멍에 검은 액체를 쏟아버리고 끈적끈적한 병을 여러 번 씻은 다음 참꽃을 예쁘게 꽂았다.
 
저녁이 되어 집에 들어오시던 엄마가 코를 킁킁킁하며 냄새를 맡으신다. 보따리를 내려놓으면서 “이게 뭔 냄새냐? 어데서 똥 냄새가 이렇게 심하게 나냐? 니 똥쌌나?” 하신다. 나는 어이없어하며 엄마를 쳐다보았다. 집안 구석구석을 코를 킁킁거리며 둘러보시던 엄마는 부엌 찬장위에 참꽃이 꽂혀있는 소주병을 보시더니 기가 막히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셨다. “니 이 병에 있는거 어쨌노?”하고 큰 소리로 물으신다. “응 썩은 게 들어있어서 수챗구멍에 버렸는데~~” “아이구 이 바보야. 그게 뭔지나 알고 버렸나? 그 비싼 참기름을 홀딱 쏟아버리고 뭔 꽃을 꽂아놨냐?” 하시면서 부엌에 있는 빗자루를 냅다 드셨다. 나는 화들짝 놀라 뭐라 변명할 틈도 없이 집밖으로 후다닥 뛰어 달아났다. 엄마의 매를 피해 집 뒤 정자로 단숨에 달려갔다.정자마루에 씩씩 거리며 앉아있는데 좀체로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꽃 꽂을 병 하나 없는 우리집이 싫었다. 다 썩은 참기름이 뭐 그리 소중하다고 이쁜 꽃을 보고 매를 든 엄마도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고소한 참기름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썩은 똥 냄새가 나는지 그 때는 몰랐기에 썩은 기름 아까워하는 엄마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천으로 널린 1회용 패트병이나 예쁜 병을 버릴 때마다 내 맘에는 참기름병에 꽃힌 소담스런 참꽃이 핀다. 어르신들이 '옛날이 좋았지'하면서 추억을 이야기하면 듣기 지겨워했는데 다 먹은 참기름병 앞에 두고 눈을 게슴츠레 감으며 감상에 젖는 내모습이 영락없는 노인네다. 작고 소중한 것이 가슴속에 추억으로 차곡차곡 담기는 것을 보니 늙어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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