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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Jul 07. 2019

엄마, 저 포도는 어차피 시어서 못먹어!

1박 2일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새벽부터 잠이 깼다. 어제 쓰다만 정책보고서 ppt를 급하게 마무리하고 오늘 엄마가 드실 반찬을 만들어야 한다. 거실에 불을 켜고 가만가만 노트북을 켰다.

어제 마무리 해야 하는데 입사 동지의 퇴임 송별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빠질 수 없는 자리다. 막내에게 엄마를 부탁하고 모임에 갔다. 먹는둥 마는둥 하며 30년전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연신 카톡이 온다. 언제 오냐고? 식구들 다 모였다고. 일주일만에 만나는 식구들이다. 곧 간다고 하고 아직도 수다중이다. 여덟시가 다 되어 일어서서 전화하니 자기들끼리 냉면 시켜 먹었단다. 그러면 됐지. 웬 호출이람? 하면서 생각하니 저녁먹으러 오라고 한 건 나다. 뭔 정신으로 사는지!

집에 와서 아이들이랑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하고 나니 한밤중. 졸음이 쏟아진다. 그렇게 잠들고 이제 일어난거다.

그런데 엄마는 잠귀가 왜 이리 밝은지! 벌써 보행기를 밀며 나오고 있다. 노트북을 접고 아침 식사준비를 서두른다. 뚝딱뚝딱 가지쪄서 무치고, 호박잎 찌고, 도토리묵 데치고, 양념장 만들고, 밥 하고, 미역국 데우고... 40분 걸렸다. 내심 오늘 저녁까지 반찬 됐네 하면서 상을 차리며 내 몫으로 닭 가슴살을 꺼내 후라이팬에 데운다.

밥을 먹고 있는데 디리릭 전화가 온다. 사촌언니다. 엄마를 보러 온다고 한다. 순간 거절도 못하고 머리속엔 '아 여행은 못가겠구나!' 하는 생각만 떠오른다. 엄마가 젤 좋아하는 언니인데, 엄마는 통역이 필요하다. 하는 수 없이 모든 걸 내려 놓고 설겆이하고 보고서 마무리하고 언니를 맞았다. 언니는 요리를 잘 한다. 엄마는 언니를 보자마자 열무김치를 담가 달라고 한다. 얼마전부터 나한테 열무 사다 김치 담그라 했는데 내가 종갓집 열무김치를 사다드렸더니 한 젓갈 맛만 보고만다. 성에 안찬다는 뜻. 그런데 오늘 임자 만났다.

농협수퍼 가서 엄마 주문에 따라 열무와 부추,오이,홍고추를 사왔다. 큰 다라이를 꺼내 열무를 씻기 시작하며 대 작업이 시작되었다. 찹쌀풀을 쒀서 열무 물김치를 담그고, 양념을 만들어 열무 겉절이, 오이소박이까지 담그니 한나절이 쏜살같이 지났다. 처음에는 내 일정 망가진거 땜에 툴툴 거리며 시작했는데 다 포기하고 나니 재미 있었다. 다 해서 김치통에 넣고 쳐다보니 부자가 된듯이 푸근하다.

여행 하나 포기하니 모든 게 다 해결되었다. 보고서 보냈고, 엄마 먹을 김치 푸짐하고, 언니가 왔는데 결례를 안해도 되었고, 아이들 편하게 해줬고, 뭣 보다 엄마 맘 편하고. 이래서 그 옛날 엄마들은 자식 키우고 부모 돌보며 평생 동네밖 한 번 못나가보고 집안일만 하다가 늙었나보다. 그에 비하면 신나게 직장 다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고,배우고 싶은 거 배우며 사는 이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냐! 어차피 여행가봤자 잔뜩 먹어서 다이어트나 실패할 거 잘 됐지뭐! 눈물을 머금고 신포도를 포기한 여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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