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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Aug 18. 2019

엄마 부엌을 물려받으니 엄마는 아이가 되어 있네

매일 끼니때가 돌아오면 전자레인지가 열심히 돌아간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요란스레 닭가슴살을 데워 먹는다. 100g씩 먹기도 좋게 포장되어 전자레인지에 1분만 데우면 요리 끝이다. 이렇게 간편한 요리가 가능한데 평생 부엌을 서성거리던 엄마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렇게 먹을거리를 고민하며 살았는데 나는 살이 쪄서 다이어트가 필요하고, 엄마는 몸이 아파 제대로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드시지도 못한다. 오십 년 동안 엄마가 책임지던 부엌을 물려받은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마트를 휘돌며 카트를 채워 와서 간편 요리로 식탁을 차린다. 계절마다 나는 제철음식이나 보양식은 엄두도 못 내고 전자레인지에 의지해 그저 삼시세끼 겨우 밥상을 차려낼 뿐이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늘 유목민 같았다. 일찍이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와 단 둘이 남의 집 문간방을 여기저기 옮겨가며 살다 보니 세간이라고는 알량한 장롱 하나가 없었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만들어 남기신 궤짝이 그나마 목재로 된 세간이었고 가운데 지퍼가 길게 달린 비키니 옷장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부엌세간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가 살던 남의 집 문간방에는 별도로 부엌이 없었고 흙으로 바른 부뚜막과 한가운데 가마솥 아궁이가 전부였다. 부뚜막 끝에 호마이카로 된 작은 찬장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는 반찬과 양념 통을 넣어놓고 먹었다. 전기도 나중에 들어온 시골 동네이니 냉장고 등속이 있을 리 없었다.      


엄마와 나는 노란 양은 밥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수북이 담은 밥 한 그릇과 냄비째 올려놓은 찌개, 그릇에 쑹덩쑹덩 썰어 담은 김치가 전부였다. 어쩌다 콩나물밥이나 무밥을 하면 큰 양푼에다 양념장을 넣고 쓱쓱 비벼서 머리를 맞대고 먹었다. 국이면 국, 된장이면 된장, 한 가지 일품요리에다가 김치나 나물 한 가지 반찬으로 일식 삼찬 도 제대로 못 챙겼다.     


화려한 요리도 없는 소박한 나물 밥상이었지만 우리 모녀는 대장정을 떠나는 보부상처럼 늘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었다. 엄마는 보따리를 이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다 보니 밥 먹는 시간에 어떤 집이라도 가야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이 맞지 않는 날은 점심을 굶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게나 식당이 없던 그 시절 시골에서는 돈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단골 마을이라 어느 집이든 끼니때에 가면 엄마에게 밥을 주고 그 참에 사람들은 옷 구경을 마음껏 했다. 모내기철이면 논두렁에 앉아서 들밥을 먹기도 하고 어느 집에선가 챙겨주는 고구마 몇 개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온 나는 다짜고짜 가마솥에 넣어놓은 밥그릇을 꺼내 흙 부뚜막에 앉아서 반찬 한 가지 놓고 후딱 먹은 다음 골목으로 놀러 나가곤 했다. 우리는 번듯한 밥상을 차려서 근사하게 먹는 품위를 유지할 욕심 따윈 애당초 내지도 않았다. 그때는 다들 풍족하지 않아 밥도 제대로 못 먹을 때였기 때문에 고봉으로 담은 밥그릇과 제철마다 나는 채소라도 먹을 수 있었던 나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읍내에 나와서 자취를 하면서 나는 엄마가 챙겨주는 밥을 졸업했다. 직접 밥을 해 먹는 경우는 거의 없고 학교 앞에서 풀빵 한 봉지를 사서 끼니를 때우거나 며칠을 빵과 라면만 먹은 적도 많았다. 그 당시 유일한 낙이라면 5일장마다 엄마가 읍내에 와서 사주시는 짜장면을 먹는 것이었다. 장날이 되면 언덕 위 꼭대기에 있던 학교에서 내리막길을 한달음에 내달아 읍내에 있는 엄마의 단골 도매 옷집 몇 곳을 기웃거리며 엄마를 찾곤 했다. 읍내에 있는 중국집에서 엄마는 우동을 드시고 나는 짜장면을 시켜서 입가에 시커멓게 묻혀가며 후루룩후루룩 맛나게 먹어치웠다.     


서울 친척집으로 나를 전학시켰던 엄마가 고등학교 삼 학년 때 내 성화에 못 이겨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왔다. 엄마와 같이 살게 되면서 우리의 아침밥 대장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엄마는 내가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학교에 못 가게 했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먹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난 날은 아침밥 때문에 엄마와의 승강이가 벌어졌다. 머리를 감아야 한다는 나와 머리를 못 감아도 밥을 먹고 가야 한다는 엄마의 주장이 맞서서 한 치의 양보도 없다. 한 고집하던 성격인 나는 엄마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머리를 감았다. 엄마는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감은 머리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물을 뚝뚝 흘리며 밥을 먹었다. 시간이 늦어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그대로 튀어 나갔다. 너무나 추운 겨울이었다. 정신없이 학교를 향해 뛰었다. 30분은 족히 걸리는 학교에 도착했을 때 추위에 볼은 찢어질 것 같은데 머리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흑인의 레게 머리 스타일이 되고 말았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계속 다니는 딸 때문에 아이 셋 키우는 것은 엄마 몫이 되었다. 젊은 주부들이야 웰빙이다 뭐다 해서 무 농약 친환경 식품을 구매하고 식품첨가제에 대해 꼼꼼하게 연구하며 살림을 한다. 엄마는 유난스레 그런 것을 챙기지도 않지만 우리 집 밥상을 휘둘러보면 가공식품이 자주 올라오지 않았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두부찌개가 주된 국물요리이고 김치, 나물무침, 콩자반, 멸치, 생두부 양념간장, 계란찜 정도가 곁 반찬이다. 가끔 특별히 준비하는 것은 사골국, 시래기 감자탕, 삼계탕 닭죽이고 별미로는 김치부침개, 호박전, 부추전, 감자전이었다. 평생 엄마가 만든 밥상은 거창하게 칭송받을 요리는 아니었지만 이름 그대로 건강밥상이었다.     


아이들이나 내가 라면을 좋아해서 삶아 먹을라치면 엄마는 월 2회로 제한해서 제약을 가하고 분식 욕구를 대체하기 위해 국수를 삶아주셨다. 소면을 적당히 삶아 멸치 다시마 국물을 부은 잔치국수를 만들고, 묵은 김치에 고추장 넣어 조몰락조몰락 무친 고명을 얹으면 라면 생각이 싹 가신다. 엄마는 면발 굵은 젖은 국수를 좋아했는데 감자 큼직큼직하게 쪼개 넣고 대파 몇 줄기 듬성듬성 썰어 넣은 다음 굵은 멸치 한 움큼 집어넣어 푹 끓이면 그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날이 썰렁하거나 비 오는 저녁에 한 그릇씩 먹으면 시쳇말로 둘이 먹다 하나 없어져도 모를 맛이다.      


식구들 생일이 다가오면 엄마는 꼭 수수 팥 단지를 해주셨다. 요즘은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다가 촛불 켜고 노래 부르는 것이 일상이 되었지만 아이들 어릴 적에는 세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수수 팥 단지를 만들었다. 수수 팥 단지는 뜨거울 땐 맛있는데 식으면 금방 딱딱해져 맛이 없었다. 그래서 생일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떡을 만들고 작은 개다리소반에 한 접시 수북이 먼저 담아 물 한 그릇 떠서 옆에 놓고 상 앞에서 두 손을 비비면서 아이들 건강을 기원했다. 예부터 내려온 말에 의하면 수수와 팥의 붉은색이 귀신을 쫓아 어린아이를 잡아가지 못한다고 했다.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나는 세 아이들 건강이 엄마의  기원 덕이라고 믿고 있다.     


엄마는 계절마다 갈무리 묵나물 장만하기에 바빴다. 가을에 김장하고 무청이나 배춧잎 말려 시래기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봄이 되면 초파일 되기 전에 늘 쑥을 뜯으러 갔었다. 온 식구가 봉고차를 타고 경기도나 강원도 어느 이름 모르는 동네로 갔다. 개울 옆 나무 그늘 밑 밭두둑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전투병처럼 검은 비닐봉지 두 세 개씩 허리춤에 매달고 흩어졌다. 등에 내리쪼이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들판에 지천인 쑥을 캤다. 봉고차 뒤 짐칸이 그득하게 쑥을 캐 놓고 논두렁에 앉아서 싸가지고 간 밥과 나물, 소시지, 계란찜을 펴놓고 먹으면 그 맛 또한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밥을 먹은 다음 돗자리에 누워 다들 한 잠씩 자고 나서는 다시 집으로 온다.     


집에 오자마자 다른 식구들은 거실에 그대로 드러누워 버리지만 엄마와 나는 온 거실에 쑥을 펴 놓고 다듬기 시작한다. 피곤하다고 조금 있다가 하자고 하소연하지만 뜨거운데 그냥 두면 다 떠서 못 먹는다고 한사코 쑥을 뒤적이시며 다듬는다. 허리가 아프도록 다듬은 다음에는 큰 솥을 두 개 가스레인지에 얹어서 쑥을 데쳐낸다. 소다를 약간 넣어 파란 초록색으로 삶긴 쑥이 색깔이 변할 새라 싱크대에 물을 틀어 부지런히 헹군다. 작업이 다 끝나면 엄마와 나는 끊어질 듯한 허리를 거실에 누이며 내년에는 이 짓을 다시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해마다 때가 되면 모두 잊고 다시 쑥을 캐러 들판으로 간다. 쑥을 아이들 주먹만 한 크기로 얼려 놓고 쌀가루를 빻아다 냉동실에 넣어 놓으면 수시로 쑥버무리. 쑥개떡, 쑥절편, 종류별로 해 먹을 수 있어 좋다. 아이들도 최고로 좋아하는 음식이다.     


묵나물 장만뿐 아니라 마늘, 고춧가루, 매실액 등 기본양념은 제 철에 한 보따리씩 사서 빻고, 찧고, 담가서 냉장실, 냉동실 구석구석 저장한다. 시장을 가면 요모조모 살피며 감자, 고구마, 양파, 대파 등 한동안 두고 먹는 야채를 사서 베란다에 놓아둔다. 떨어지기 전에 품목들을 미리미리 살펴 시장 갈 때마다 사다 채워 넣는다. 그리고는 하루 한 번 마실 가듯 시장이나 마트를 들러 제철 과일이나 야채를 그때그때 사들고 온다. 냉장고는 빈틈이 없고 냉동실은 한 번 열 때마다 떨어지는 덩어리에 발등 찧지 않게 조심해야 될 정도다. DB구축하듯이 기본 재료가 쌓여 있으니 어떤 요리도 자유자재로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면 엄마의 첫마디는 "밥 먹었냐?"였다.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기라도 할라치면 어느새 쌩하고 부엌으로 들어가셔서 가스레인지 불을 켜신다. 가끔 늦게 집에 들어가는 날은 현관문을 들어서며 "저 밥 먹었어요"라고 먼저 말한다. 아이들, 신랑 식구수대로 들어오면서 엄마로부터 "밥....!"을 듣지 않는 사람은 없다. 엄마의 밥에 대한 애착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3대 영양소가 어떻고 칼로리가 어떻고 하면서 음식을 가려먹으며 건강을 위한다고 하지만  엄마가 만드는 밥상은 그런 계산 없이도 건강밥상이고 그 밥상으로 내가 크고 아이들이 자랐다. 엄마밥상으로는 고혈압 당뇨 등 성인병이 생길 여지가 없다.      


이제 곧 엄마 나이 팔순이 된다. 백세를 사는 시대에 아직 정정할 시기지만 파킨슨을 앓고 계신 엄마는 혼자 거동을 못하신다. 이제 부엌을 졸업하고 앉아서 밥을 받아 드시는 처지가 되었다. 오십 평생이 되도록 직장 생활한다는 핑계로 집안 살림은 거들떠도 보지 않던 딸이 만드는 먹거리가 엄마 성에 찰리가 없다. 말을 하실 수 있던 작년까지만 해도 부엌에 앉아서 참견을 했었다. 이제는 그나마 목소리도 잘 안 나오니 모든 역할을 다 놓으셨다.      


엉터리 주부로 살림을 물려받은 나는 동네 슈퍼 쇼핑으로 ‘뚝딱 요리’의 전수자가 되어간다. 계절마다 갈무리된 식품을 재료로 ‘뚝딱 요리’를 만든 엄마와 달리 나는 일주일 슈퍼 쇼핑을 통해 ‘뚝딱 요리’를 한다. 요리를 주어진 의무로 생각하니 정성보다는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매주 토요일이면 쇼핑카트 가득 야채, 과일, 반 조리 식품을 채운다. 엄마가 싼 가격을 찾아 품목별로 시장과 마트를 병행한 방법을 난 결코 따르지 않는다. 어디든 한 군데서 모든 쇼핑을 한다. 돈으로 시간을 사는 셈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요리하나 제대로 못하는 무능력 주부도 식구 굶기진 않게 되었다. 엄마 마음엔 전혀 들지 않겠지만.     


한 여름이 되면서 엄마가 열무 타령을 했다. 회사일과 여러 가지가 겹쳐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어느 날 사촌언니가 와서 열무 물김치를 담가주고 갔다. 어찌나 맛있게 드시는지 ‘이렇게 좋아하는 걸 김치 한 접시 제대로 못 해 드리다니’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파킨슨이 찾아오면 대체로 손이 떨려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 그런데 엄마는 발이 끌리고 균형을 잃어 잘 걷지 못하고 목소리가 안 나와 말을 못 하는 증상이 왔다. 시간이 갈수록 인지기능도 떨어지고 있다. 밥그릇에서 입까지 한 숟가락 음식 들어가는 시간은 한없이 길게 느껴진다. 턱받이를 하고 흘리며 흔들리는 숟가락이지만 이 상태라도 오래가길 바랄 뿐이다. 데이케어센터에서 종일 지내시기 때문에 집밥을 드실 수 있는 건 아침식사뿐이다.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이 어디까지인지 모르지만 내가 해드릴 수 있는 반찬은 한계가 있다. 유튜브를 보며 한 가지씩 익혀나간다. 원래부터 좋아하는 음식들로 돌려막기도 한다. 된장 쌈을 싸는 양배추나 호박잎, 초당순두부, 열무김치, 된장찌개, 양지고기 미역국, 가지볶음, 계란찜, 깻잎김치, 멸치국수, 감자전, 부추전, 호박전, 수제비가 돌아가며 상에 오른다. 영양이 좀 부족하다 싶을 땐 오리고기나 소고기, 돼지고기를 사다가 아침에 한 조각씩 구워 상추와 함께 드린다.     


엄마가 언제까지 나와 함께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오십 년 넘게 식구들 삼시세끼 밥상을 차려준 엄마가 이제 아이가 되어 돌아왔다. 아이들 어렸을 때 밥상머리에 앉아 생선가시 하나하나 발라주고, 턱밑에 흘리는 밥풀 걷어 올려 주던 그 엄마가 이제 입가에 반찬을 묻히고 식탁에 국물을 흘린다. 그 옛날 엄마가 하던 십 분의 일만 해도 세상에선 효녀 소리를 듣는다. 솜씨 없는 딸이 해주는 음식이라도 한 그릇 뚝딱 먹어 주고, 손이 떨려 식탁에 반찬을 흘려도 한 끼 든든하게 드시며 내 옆에 오래 있어주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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