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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Sep 07. 2019

엄마의 끈

80년 오월 나는 집을 나갔다.

대학은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다. 입학후 두달동안 최루탄과 화염병 속에 휩싸여있던 대학은 교정에 탱크와 군인만을 남긴채 고요에 휩싸였다. 나는 휴교령이 풀리고도 학교를 가지 않았고 집을 나와 떠돌아 다녔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엄마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학교를 찾아갔다.등록을 않고 그대로 두면 제적된다는 교무처 직원의 말을 듣고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했다. 나는 대학의 가치를 찾지 못하였고 이대로 의미없이 가는 삶의 가치 또한 찾지 못해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다. 절을 찾아다니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대학을 갈망하면서도 일을 해야 하는 아이들이 다니던 공장을 전전하기도 하고, 아무 걱정 근심없이 포도농장에서 내리쬐는 뙤악볕에 농약을 치고 저녁이면 쏟아지는 별을 보는 날을 보냈다.

엄마는 하루하루 심장이 내려앉고 숨이 턱턱 막히는 날을 보냈다. 드디어 내가 집에 나타났을 때 엄마는 나에게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부평에 있는 공장에 내가 다니도록 주선까지 했다.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지만 엄마는 끝까지 줄을 놓지 않았다. 다시 복학할 때까지 나는 엄마가 해주는 아침밥을 먹고 그 공장을 다녔다. 왜 거기를 다녔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아무 의미없이 그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공장 아이들은 김천에서 삼척에서 그리고 정선에서 올라와서 기숙사 짬밥을 먹으며 일을 하고 돈을 벌어 고향의 부모님께 보냈다. 그리고 예쁘게 차려입고 휴일에 대공원에 나들이 가는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 흔히 말하는 운동권의 의식화 교육도 아니었고 노조활동도 아니었다. 나는 쓰러지려는 나를 주체하지 못해 그냥 공장에 다녔다.

그리고 이듬해 학교로 돌아왔다. 물론 돌아와서도 나는 곧 정상궤도로 들어서지 못했다. 종교 써클에 겨우 끈을 걸쳐서 의식을 연명하고 있었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끌리지 않았다. 더구나 참여와 순수로 나누어져 반목하는 무리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 쪽도 아닌 회색인이 되어갔다. 복학하고도 1년을 그렇게 헤매는 동안에도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 아침밥을 해 먹였으며 도시락을 싸주었다. 밤이 늦어도 들어오지 않는 딸을 골목입구에 나와서서 기다렸으며 집에 오면 저녁밥을 차려주었다. 나는 엄마의 잔소리를 멜로디로 들으면서 끊어지지 않는 궤도위를 곡예하듯 그 시절을 살았다.

큰 딸이 대학교 2학년에 올라오면서 휴학을 하겠다고 불쑥 이야기를 했었다. 말은 불쑥이지만 진작부터 생각을 해온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근심에 쌓였다. 아마 30년전 그때를 생각하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나는 말없이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했었다. 딸아이는 나와는 다른 고민을 했다. 공부도 동아리도 열정도 어설픈 상태에서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무언가에 푹 빠져보고 싶다는 기색이었다. 나는 오히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일찌감치 빠져보려는 딸이 부러웠다. 지금까지도 그때하던 풍물 동아리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고있다.

나는 방황하였지만 오래 깊숙이 빠지지는 못하였다. 일단 저지르는 용기는 있지만 극단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는다. 사회의 규범화된 체제에 익숙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나의 행동은 일탈이거나 저지르는 용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내면의 요구에 바닥까지 내려가지 못한다. 마지막 선을 넘지 못하고 두려워 돌아선다. 그리고 미처 다 타지 못한 젖은 장작같은 열정을 아쉬워한다.

나는 엄마가 끝까지 놓지 않던 그 끈 때문에 늘 바닥에서 끌어 올려졌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서 모면일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다 타서 재가 되지 못하고 꺼져버린 내 열정이다. 어쩌면 나는 엄마를 핑계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온 마음을 던졌을때 산산이 부서질 정신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장작은 모조리 탄 연후에야 그을음 없는 최상의 불꽃을 피울 수 있다. 타다만 장작은 다시 불을 붙일 수도 없다. 나는 그렇게 인생의 고비마다 타다만 장작만을 던져둔 채 다음 계단으로 올라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년에 든 지금 아직도 목마른 나는, 다 태우지 못한 열정의 장작에 다시 불을 지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다.

엄마와 연결된 나의 끈은 이제 80년이라는 세월로 쌓였다. 엄마 몸에서 나오면서 탯줄은 끊어졌지만 보이지 않는 모녀의 인생의 끈은 오랜 세월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까지. 예전의 엄마의 끈은 내가 완전히 실패하지 않도록 하는 보호막이었지만 지금은 어쩌면 내 발목을 잡는 장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가 가로막는 장애는 내 인생에 어쩌면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라는 기회.

엄마는 스무살 그 때 내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위태로운 끈을 이어주었고 이제 삶의 마지막에 행복의 의미를 찾도록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있다. 끝까지 나를 정신적으로 지켜주는 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픈 신체를 보듬어 주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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