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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Aug 28. 2019

새로운 문이 열리는 여행

다이어터의 2박3일 제주여행

어떤 여정은 곧은 직선으로 뻗어있고 어떤 여정은 빙빙 에두르는 길이다. 어떤 여행은 영웅적이고 어떤 여행은 두려움과 혼란투성이다. 하지만 모든 여행은 정직하게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세상의 절실한 요구를 만나는 어떤 지점으로 이끌어준다.     


-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파커J.파머 -     


살아가는 길에서 잠시 곁으로 벗어나는 때가 있다. 여행도 그렇다. 일상에 발목 잡혀 옴짝달싹 못할 것 같다가도 어느 날 다른 쪽 문이 열린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고 서로의 신뢰가 있다. 그렇게 세상 어딘가로 연결된다.     


엄마의 움직임이 어려워지며 여행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교육과정의 졸업여행이라는 기회가 와서 가족 모두의 도움을 받고 나는 여행을 떠났다. 살랑 살랑 부는 바람이 있는 제주도다. 비행기 날개만 봐도 가슴이 뛴다. 3일의 시간을 허락해준 가족에게 감사하며 제주로 뛰어든다.     


여행엔 뭐니 뭐니 해도 맛난 음식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래서 다이어트 중 여행계획이 잡히면 그 즐거운 마음 한구석에 먹구름이 낀다. 이번 제주여행은 그야말로 다이어터에게는 가혹한 시험이다. 처음 일정표를 받아 삼시세끼 맛집을 보니 다이어트 실패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첫날 공항에 도착해 제주 돌문화공원을 둘러보며 약 2킬로 가량을 걸었다. 식전도보를 했으니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 식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품목이 닭고기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닭 가슴살만 먹으리라! 그러나 푸짐한 식탁을 받은 후 내 마음은 깃털보다 가볍게 변하고 말았다. 이번 여행에 식단일지 쓰는 것은 안하리라 결론을 내렸다. 이 맛난 음식 앞에 스스로를 쥐어짜며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돌아가서 더 열심히 운동해야지!


'도리골 토종닭' 유명한 집이라고 한다. 제주 토종닭의 신선한 닭 가슴살 샤브샤브와 백숙, 맛있는 죽과 21도 깔끔한 한라산 소주까지, 마음껏은 아니지만 부족하지 않게 먹었다. 기분이 좋다.


배불리 먹었으니 또 구경을 하며 운동을 해야지! 절물휴양림 산림탐방을 현지의 매력적인 해설사와 함께 했다. 자연을 향유하고 맛을 경험하며 문화를 즐기는 하루가 되었다. 다이어트에 대한 부담을 접어두니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절물휴양림 산림산책코스

저녁식사도 푸짐하게 먹었다. 제주 현지인이 추천하는 '해모루 횟집' 이다. 고급스럽진 않으나 가성비 최고의 맛집이란다. 고등어회 뱃살과 옥돔, 각종 회, 지리, 고등어간장에 싸먹는 쌈이 맛있었다. 또 한라산을 반주로 즐겼다. 후회하지 않으려 최대한 절제하며, 또 후회하지 않으려 다양하게 다 먹었다. 맥주와 노래가 동반되는 저녁의 여흥이 있지만 이것만은 마다하고 숙소로 들었다.     


첫날 이만 보에 육박하는 도보기록을 세운 후 둘째 날은 용머리해안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제주의 본토박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 멋진 시니어들이다. 저마다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자연과 지질을 이야기하며 제주에 오래 살아온 본인들의 어머니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를 해주신다. 그것이 사료상으로 정확한지 중요하게 따지는 분도 있겠지만 나는 그 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세월의 이야기가 좋다. 그렇게 전설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용머리해안

용머리해안의 화산이 만든 지질을 보며 한 때 뜨겁게 녹아 내리던 용암을 떠올린다. 젊음의 끓는 피가 이제는 식어 화석이 되었지만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사람의 이야기도 자연과 같지 않은가? 누군가의 입으로 글로 전해지는 삶의 이야기가 좋다.


용머리를 지나 가파도 선착장으로 향한다.     

조용한 섬 가파도에 한 무더기 사람들 웃음꽃이 핀다. 나지막한 집들에 사는 어르신들은 무더위끝 시원한 바람을 나그네들에게 양보한다. 마을이 고요하다. 멀리 산방산과 마라도가 보인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을 닦으며 가파도의 하늘과 코스모스, 고요히 다가왔다 물러가는 바다를 곁에 끼고 섬을 반 바퀴 돌고 뜨거운 태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코스코스 꽃밭에서 한 편의 영화를 찍듯이 이리저리 포즈를 잡으며 돌아다녔다.

가파도에서 보는 본섬

'가파도 올레길 식당' 해녀 할머니! 이제는 오랜 물질로 여기저기 아픈 몸에도 단골 사장님의 특별부탁으로 나오셨단다. 직접 주방에서 준비를 지휘하다가 사장님의 소개로 방문객들 앞에 나와 수줍게 웃는다. 해녀할머니는 말없이 보말칼국수 국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할머니의 보말 국수물은 천상의 맛이다. 살찐다고 칼국수는 몇가닥만 먹었지만 보말국물은 숟가락으로 떠서 한방울 남김없이 먹는다. 보말국물 맛에 푹 빠진 한 분이 "국물 더!"를 외쳤지만 보말국물 진액은 물을 많이붓지 않기 때문에 추가는 "국물도 없다."

가파도 올레길식당 해녀할머니와

가파도를 나와 알뜨르 비행장, 수월봉, 월령선인장 마을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둘째 날 도보거리도 전날 못지않은 듯하다.     

 

저녁식사로 제주 흑돼지 메뉴와 한라산을 폭파시키듯 폭탄주가 날아다녔지만 오히려 마음은 평온함을 유지했다. 돼지고기는 집에서도 늘 먹는 건데 굳이 많이 먹을 필요가 있나? 스스로 세뇌를 하였지만 두툼한 비계가 붙은 고기 한 점을 입안에 넣고 나니 평정심은 깨지고 이빨에 임시로 박은 봉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먹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 ‘이생망’을 외치며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분위기 있는 와인 한 잔으로 제주의 밤을 즐긴다.

정원의 와인파티

 한 여름휴가의 열기도 지나가고 아름다운 신혼의 물결이 몰려 오기전 비교적 덜 붐비고 여유로운 제주의 마지막 8월의 밤이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맛난 음식을 앞에 놓고 앉으니 밤이 깊어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교육과정을 함께 한 동기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와인잔을 부딪힌다.      

매일밤 여흥이 있고 어제도 와인파티후 또 만남의 자리가 있었지만 마지막 날 오름을 즐겁게 오르고 싶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비 예보도 있었지만 한라산을 잠깐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체력을 비축했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 주위 애월 해변을 산책하고 토마토 쥬스와 과일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드디어 오름 입구다. 간간히 뿌리는 가는 빗방울에 우산을 들고 산행을 시작했지만 이내 비는 그쳤다. 두어 번 쉬며 초반의 경사로를 지나니 이내 능선길이다. 능선에 들어선 순간 구름에 가려있던 한라산에 밝은 광채가 비친다. 얼마만에 맞이하는 환희의 순간인가?

노꼬메 오름에서 바라본 한라산

무릎 연골이 파열된 후 등산을 그만둔 지 4~5년이 되었는데 그 후로 급격하게 몸무게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번 산행은 다이어트와 운동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실험이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은 땀은 좀 흘렀지만 수월하게 산행을 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은 초입이 계단으로 된 급경사다. 옆에 설치된 로프를 잡고 내려왔지만 무릎에 부담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발뒤꿈치부터 붙여서 걸으며 종아리에 한껏 힘을 주었다. 등산스틱을 가져오지 않은 불찰을 탓하며 온 신경을 집중해 걸었다.


큰노꼬메 오름은 표고가 834m이고 비고가234m라고 하니, 234m 올라와서 834m의 전경을 감상하는 셈이다.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이고 한라산부터 제주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오름 중에서는 경사와 높이가 꽤 높은 편이라고 한다.


운이 좋다는 것은 여행의 한 요소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해도 자연이 우리를 허락하지 않을 때가 있다. 모든 일에서 겸손해야 하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게 행복한 삶의 비결이다.


여행의 마지막 코스를 방주교회로 잡은 이는 건축의 예술미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 모든 무사한 일정이 어쩌면 보이지않는 제주의 신들에 의해 호위를 받고 있었다는 생각에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되었다. 우리에게 허락한 삼일동안의 날씨와 아무에게도 사고가 일어나지않고 무사히 여행을 마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의식처럼 느껴진다.     

방주교회

마지막 여정을 마치고 제주를 떠난다. '아무리 즐거운 여행도 돌아온 집만 못하다.'는 말이 맞을까? 서울 지하철의 왁자한 인파가 돌아온 여행객을 맞는다. 이번 여행에서는 다이어트와 운동의 효과가 무효가 될까 두려워 가급적 먹는 것을 조심했고, 걸을 때 무릎에 무리가 오지 않게 주의를 기울였다.   

    

여행 다음날 무릎이 아프고 종아리에 알이 땡땡하게 베었다. 이거 이러다 무릎 아픈 게 도지는 건 아닌지 은근 걱정이 되었다. 그동안 운동 좀 했다고 무리한 건 아닐까? 이런 우려를 안고 종일 사무실에서 짬짬이 스트레칭을 했다. 퇴근 후 어기적어기적 걸어 계단을 내려가 PT센터로 갔다. 무릎 아픈데 운동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코치는 그건 아픈 게 아니라 며 'pt30개!'를 가차 없이 외친다. 뭐 코치가 괜찮다니 믿어야지. 몸은 좀 무거웠지만 평소대로 운동을 했다. 종아리를 풀어주러 폼 롤러를 대고 문지르는데 창피할 정도로 '으악~~' 소리를 질렀다. 센터에서 운동하던 사람과 다른 코치가 놀라서 쳐다봤다. 그래도 풀어주니 나았다.      


50분 운동을 하고 드디어 체중계에 올라섰다. 3일 동안 먹어치운 제주의 맛있는 음식의 대가를 받아야 할 순간이다. 체중계에 올라선 나는 깜짝 놀랐다. 체중이 지난주와 같다. 이럴 수가! 열심히 먹었는데 몸무게가 그대로라니. 3일 동안 하루 이만 보에 육박하게 걷고, 오름도  올라갔더니 먹은 게 다 소모되었나보다. 몸은 피곤하지만 기분이 좋다. 더 좋은 건 운동을 하고 나니 무릎이 덜 아프다는 것이다.     


때로 한 번씩 규칙을 벗어나기도 하지만 오랜 프로젝트라면 곧 바로 궤도로 들어오는 것이 중요하다. 다이어트나 운동은 특히 그런 것 같다. 한 두 번의 일탈로 몸무게가 다시 증가하거나 사정으로 인해 운동을 한 두 번 빠지다보면 ‘에잇 이왕 버린 몸’ 하며 포기하는 경우가 생긴다. 아니면 ‘오늘까지는 무효로 하고 다시 시작하자.’ 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한다. 헬스장을 등록한 것이 아까워 사용기간 연기 신청을 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데 내가 수차례 뭔가를 시도하다 포기한 경우를 돌아보면 처음 한번 스케줄을 어겼을 때인 경우가 많다. 한 번 실패했더라도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바로 다시 궤도로 돌아와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과뿐 아니라 과정을 즐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은퇴 후 행복한 삶을 위한 준비의 하나로 운동과 다이어트를 시작했기 때문에 뭔가 가시적 성과가 눈에 보여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지금 행복한 것이 더 중요하다. 뭔가를 준비하고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주는 즐거움이 일을 마치고 난 결과보다 어찌 보면 더 소중하다. 결과를 누리는 건 잠깐이지만 과정은 계속되는 것이니까.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인생을 살면서 얻은 재물과 명예가 작다고 실망하고 '이생망'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이 놓치는 것은 성공과 실패를 만들어나가는 그 시간의 소중함이다. 그 시간 자체가 행복인줄도 모르고 신기루 같은 성공의 탑을 찾다가 죽는 사람이 많다.


다이어트나 운동을 체중감량의 결과가 보일 때까지 괴로운 과정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오래 지속할 수 없다. 하루하루 노력한 시간들이 바로 나의 행복임을 안다면 잠깐의 일탈을 벗어나 바로 정상궤도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자신을 잘 지켜낸 제주여행에 대해 스스로 큰 칭찬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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