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경숙 Sep 15. 2019

다이어터의 지옥인 추석명절 뭘 먹고 지냈는가

지글지글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부침개를 한 시간이 넘게 해서 남편 손에 들려 큰집에 보냈다. 엄마에게 양념장 맛있게 해서 드리며 무의식중에 한 점 집어들었다가 얼른 놓았다. 부침개 안 먹고 버티기 성공이다. 밀가루와 기름이 내 몸속에 들어가는 상상을 막 했다. 어휴! 먹지 말아야지.

큰집에서 차례를 지내니 분담맡은 부침개외에 다른 음식은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엄마 서운할까싶어 시장 가서 송편과 식혜나 사올까 했다. 둘다 칼로리 치명적 음식이긴하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 차례지내고 올 때 큰 형님이 늘 음식을 싸줘서 몇일씩 먹었던 기억이 났다. 남편에게 "형님 음식 싸주시면 송편만 가져와요."라고 당부를 하고 송편은 안샀다.

전날 배추적을 많이 드신 엄마는 아침생각이 없다고 하셔서 스프를 국 삼아 끓여드렸더니 밥을 말아서 잘 드셨다. 푸고 남은 스프 반공기에 닭가슴살로 나도 아침을 먹었다.

점심은 재워둔 불고기를 해서 배추쌈을 싸서 먹었다. 밥도 반공기 먹었다. 엄마는 수퍼에서 산 불고기 양념이 '너무 달아서 맛이 없다.'하시면서도 쌈을 싸서 한접시 다 드셨다. 배 하나 싹싹 갈고 양파, 마늘, 파 넣고 단맛은 적당히 넣은 엄마표 불고기 양념장에 비하면 사온 양념은 걸쭉하고 내 입에도 너무 달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손가는 것이 싫어 양념장을 사왔더니 역시 고객 불만이 있구나 생각했다.

차례를 지내고 남편과 아들이 왔다. 손에 보자기 싼 것을 들고 들어오니 엄마 눈길이 손으로 간다. 반갑게 받아 식탁에 놓고 펴는데 '송편이 없다' 잡채와 각종 전이다.' 어이쿠야!' 송편 먹으려고 목을 빼고 기다리던 엄마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어쩐담! 하는 수 없이 잡채를 꺼내 팬에 시골 참기름을 두르고 살짝 데워서 드렸다. 반접시 밖에 안 드신다. 나는 먹지 않았다.

아무래도 맘에 걸려 시장을 나가봤다. 예상대로 떡집을 비롯해서 모두 문을 닫았다. 집에 와서 차를 몰고 인터넷에 검색된 인근 떡집을 집집마다 찾는데, 옛 설화에 아픈 부모님께 드리려고 겨울에 바위에 핀 꽃을 찾아 나선 자식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쨌든 모든 떡집은 문을 닫았다. 떡집뿐 아니라 수퍼와 과일가게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은 걸 보니 '민족의 명절'이라는 실감이 났다. 졸지에 불효녀가 된 나는 기운이 쭉 빠져 집에 와서 변명을 늘어놓고, 하필 올해 떡을 안 보낸 형님을 원망하고, 떡 싸달란 소리도 안하고 자기만 배불리 먹고 온 남편도 곁눈 흘기며 추석날 흑역사를 쓰고 말았다. 덕분에 내 다이어트 전선의 장애물 하나가 사라진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다.

저녁에는 네 식구가 불고기를 한 판 해서 남은 상추쌈을 바닥을 보고 남은 잡채도 데워 먹었다. 나도 작은 접시로 하나 잡채를 따로 담아 먹기 시작 하는데 막내가 "엄마 나 반만 주세요!"한다. "안 먹는다더니! 남은 거 더 데워 올까?"하며 일어서는데 "아니. 그냥 엄마꺼 반 나눠 주세요. 안 그러면 다 드실꺼 아녜요?" '흑흑흑 아들밖에 없구나!' 하면서 흔쾌히 잡채를 덜어줬다. 이렇게 온 식구가 성원하는데 성공해야지! 하는 결심이 저절로 생긴다.

설겆이를 끝내고 사이클을 탈까 하다가 오랫만에 올림픽공원 산책을 갔다. 아들이 먼저 다녀오고 교대를 해줘서 늦은 시간에 나갔다. 보름달은 이미 중천에 떠있는데 아직 공원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나와 있다. 선선한 공기에 달도 보고 별도 보니 가슴이 확 트인다. 한시간쯤 걷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들리지도 않는 발음으로 어디냐고 물었다. 싫컷 산책 간다고 말하고 나왔건만. 뭔 일인가 싶어 서둘러 걸었다. 집에 오니 아무일 없고 엄마는 누워 TV를 보시고 보호자인 남편과 아들은 각자 핸드폰을 들여다 보며 쉬고 있다.

"엄마! 내가 그렇게 좋아?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하며 잠시도 편히 내버려두지 않는데 대한 야속함을 감춘 은유법 농담으로 얼굴을 들이대고 물었다. 그런데 엄마가 나를 똑바로 보며 '허허'하며 장난스레 웃더니 "좋아"라고 말한다. 순간 울컥했다.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이렇게 전에 없이 조용한 명절을 보내면서 '엄마 덕분에 추석 다이어트는 성공하겠네' 라고 생각했다. 송편 한 쪽 못 먹고 가는 서운한 명절이 되고 말긴 했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소꿉놀이 같은 다이어트 식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