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바젤 여행기
우리네 직장인들의 여행은 대체로 짧고, 앞뒤로 과로에 시달리며, 동료들의 크고 작은 도움이 필요한 일종의 프로젝트다. 무사히 떠나게 되면 새로운 환경, 맛있는 음식, 각종 액티비티, 일상적 의무로부터의 해방에서 오는 만족감으로 보상받는다.
경험이 늘어갈수록 스스로를 더 만족시키는 노하우도 차곡차곡 쌓여서, 내 경우에는 가능한 비행시간을 줄이고 한 도시에 오래 머무르는 걸 선호하게 되었다. 대신 숙소를 옮겨 다닌다. 1박은 너무 짧고 번거로우니 웬만하면 2~3박씩, 일주일 내외의 일정이라면 두세 곳에 머문다. 호텔을 잘못 선택했을 경우의 리스크도 덜고, 더 다양한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바젤에서는 '바젤 유스호스텔 Jugendherberge Basel(=Youth Hostel Basel)'에서만 무려 5박을 했다. 마지막 이틀은 '크래프트 바젤 Krafft Basel'에서 묵었다. 미리 고백하자면 이건 일종의 시너지 효과였다. K와 내가 각각 호텔을 고르는 기준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어서, 우리 둘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곳을 더 이상 찾아내지 못한 결과였다.
비운의(?) 후보들
01 | 그랜드 호텔 레 트루아 루아 Grand Hotel Les Trois Rois
바젤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은 두말할 것 없이 "그랜드 호텔 레 트루아 루아 Grand Hotel Les Trois Rois"일 것이다. 라인강변에 위치한 이 5성급 호텔은 3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한다. 레스토랑은 매년 미슐랭 3 스타를 받아왔다. 하지만 그만큼 가격도 높은 데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도 우리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후보에서 빠졌다.
02 | 노매드 디자인&라이프스타일 호텔 Nomad Desgin & Lifestyle Hotel
이미 언급한 바 있는 호텔 노마드가 선택받지 못한 것은 호텔 예약 사이트의 객실 사진 때문이었다. 노출 콘크리트와 합판으로 마감한 벽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무드에 어울리지 않는 형형색색의 가구와 패브릭은 우리를 경악시켰다. 스위스 바젤에 있는 디자인 호텔이라며?! 꽃무늬 쿠션보다는 멋진 걸 기대했는데.
노마드 호텔은 위치도 좋고, 가격도 합리적인 편이었지만 일정을 마치고 저 방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영 내키지가 않았다. 우유부단하게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를 위해 K가 단호하게 결정을 내려주었다. '여긴 별로.'
03 | 풀만 바젤 유럽 Pullman Basel Europe
여행지에서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지 못하면 스타벅스에 간다. 스타벅스에는 이미 알고 있는 맛과 익숙한 분위기가 주는 안정감이 있다. 호텔도 마찬가지라, 마음에 드는 지역 호텔이 없는 경우 글로벌 체인을 이용하면 실패할 확률이 낮다. 바젤에서 가장 눈에 자주 띈 글로벌 체인은 '아코르 호텔 그룹 Accor Hotels'이었는데, 업스케일 브랜드인 풀만 Pullman과 미드 스케일급 브랜드인 노보텔 Novotel, 이비스 Ibis 등 총 7개의 호텔이 이 작은 도시의 목 좋은 곳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출장과 학회의 도시답다. 하지만 바젤인지 서울인지 알 수 없는 뻔한 인테리어는 재미가 없어서 탈락.
04 | 데어 테우펠호프 바젤 Der Teufelhof Basel
반면 너무 개성이 넘치는 곳도 있었다. '아트 호텔'을 표방하는 이 호텔에는 일반 객실과 구분되는 9개의 특별한 방이 있다. 9명의 각기 다른 예술가들이 호텔 객실 자체를 작품으로 삼아, 게스트가 마치 예술작품 안에서 숙박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컨셉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이 생겼지만, 사진을 볼수록 흥미가 떨어졌다. 재미는 있겠지만 과연 저 침대에 누워 편히 쉴 수 있을까? 삭제.
후보들은 모두 어느 정도 검증된, 좋은 호텔들이다. 가족과 갔더라면, 혼자였다면, 혹은 J도 함께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여행을 위한 숙소로, 위 호텔들은 바젤 유스호스텔을 이기지 못했다. 오직 크래프트 바젤의 리버뷰만 살아남았다.
그래서 유스호스텔과 크래프트 바젤이 어땠는지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