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관하여
오늘은 표제의 제목처럼 지금 당장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독자 여러분들을 설득해보려고 한다. 지난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보다’에 이어 이 브런치북 ‘가장 확실한 미래 준비하기’를 쓰게 된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저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전파하려는 평범한 광신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러분을 설득하기엔 지식, 화술 등 부족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든든한 전문가의 지원 사격을 받을 예정이다. 오늘 내가 도움을 받을 전문가는 지난 ‘보이지 않는 죽음’에서 잠깐 소개했던 좋은 죽음 교단(OrderGoodDeath)을 설립한 케이틀린 도티다.
당장 준비해도 늦지 않은 이유
케이틀린 도티는 그녀의 서적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에서 지금 자신의 죽음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해도 결코 이른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계속 죽음만 생각하면서, ‘갑자기 주변 사람이 끔찍한 사고로 죽으면 어떡하지?’라든가 ‘출근길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와 같이 사서 걱정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죽음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왜 죽는가?’, ‘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졌는가?’와 같은 질문에 얽매이기보다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녀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을 때 충격을 받지 않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죽음을 준비한다고 해서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의 슬픔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죽음을 준비해야만 하는 이유는, 죽음을 준비함으로써 언젠가 마주하게 될 이별의 순간을 보다 온전히 슬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나에게만 찾아오는 것도, 내 주변에만 찾아오지도 않는다.
또한, 죽음은 늙어서만 마주하는 것이 아니다. 내 수명이 무척이나 길어서 자연사할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을 수도 있겠으나, 불의의 사고로 당장 내일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거다. 간단하게 죽음을 지금 준비했을 때와 나중으로 미루었을 때 그리고 내가 오래 살았을 때와 짧게 살고 삶을 마감했을 때를 가정하여 장, 단점을 생각해 보자.
먼저 가장 안타까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미루고 짧은 생으로 마감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여기저기에 공백이 생길 것이다. 사실 이런 공백자체는 굉장히 큰 문제는 아닐 수 있다. 주변에서 알아서 잘 적응하고 회복해 나갈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매우 후회가 클 것 같다. (죽은 사람이 과연 ‘후회’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살아서 내 공백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아쉬움, 주변 사람들과 조금 더 좋은 이별을 준비하지 못했던 안타까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후회로 남을 것 같다. 미리 죽음을 준비한다면 나는 내가 없어졌을 때 가장 타격이 클 것으로 생각되는 가족, 애인,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사실 이런 고마움은 굳이 죽음을 앞두고 전하기보다 평상시에 전하는 게 맞겠지만, 현대인들의 바쁜 삶 속에서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매일 같이 주변 사람들에게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고마움을 표현한다면,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울 것이고, 내가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일상에서 고마운 존재로 대하고, 유언과 같은 형태로 마지막 순간에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두는 게 내 생각에는 가장 이상적인 것 같다. 이렇게 미리 준비해 둔다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는 내가 생각보다 위험요소를 잘 피해 가서 노화로 인한 죽음을 맞이할 때를 생각해 보자. 죽음을 일찍부터 준비했다면 사실 긴 시간 주변인들에게 일상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했을 뿐 내가 딱히 손해 본 일은 없는 것 같다. 죽음의 순간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에 미리 준비해 둠으로써 편안하게 삶을 보낼 수 있었고, 긴 시간 주변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관계를 유지했기에 주변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로 잘 남았을 것 같다. 하지만 만약 죽음을 준비하는 걸 미루었다면 해야 할 숙제를 안 하면 ‘숙제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처럼 준비하기 전까지는 내내 초조함을 느꼈을 것이다. 운 좋게 적당한 시점을 잡아 준비하긴 했지만 차라리 조금 더 미리 해뒀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들 수 있을 것 같다.
내 J형 성향이 반영된 편향된 의견 같기는 하지만.. 정리하자면 죽음을 준비하는 걸 미루다가 일찍 죽어버리면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하는 최악의 상황이며, 미루는 동안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기에 초조함과 불안함을 겪을 거라는 것이다.
반대 유형(P형)의 누군가는 과제와 프로젝트는 마감기한이 다가왔을 때 초인적인 힘으로 해내는 것이 뿌듯하고 그 과정이 즐겁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들에게는, 초인적인 힘은 ‘살아서’ 낼 수 있는 것이고, 당신들이 알고 있는 마감기한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장 준비해야 하는 이유
조금 더 강하게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것에 대한 장점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논의에서 준비하는 죽음의 ‘대상’을 나에서 주변인까지 확장시켜 보자. 이러면 문제가 조금 더 복잡해진다. 내 죽음은 그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지면 된다. 나는 준비하지 않으면 주변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한 게 후회되고 아쉬울 것 같아 미리 준비를 하고자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죽음은 원래 갑작스러운 거라며 내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주변인들이 알아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각 개인이 생각하는 게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원하는 죽음에 대해 존중해 줄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의 죽음관 존중해 주려면 어떤 죽음관을 '갖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는 죽음이라는 소재를 주변인들과 소소한 대화 주제로 삼기는 어렵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묘한 부정적인 느낌, 괜히 꺼냈다가 본전도 못 뽑을 것 같은 피해야 하는 소재가 현재 죽음의 위치다. 심지어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대화를 꺼내기 어려워진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사진관에 가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아무래도 영정 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뿐인가? 죽음을 대화소재로 꺼내면, 어르신들은 괜히 자식들이 부모님이 빨리 돌아가시길 바라는 의도로 꺼낸 것이 아님을 알더라도 묘한 서운함을 느끼시곤 한다.
하지만 어렵다고 꺼내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더 꺼내기 어려워지고 따로 글로 남겨주지 않는다면 주변인들이 어떤 죽음을 원하는지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주변인들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대학 입시를 위한 선행학습은 몇 년 치를 미리미리 준비하면서도, 인생의 최종장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준비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마지막도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죽음을 음지의 영역에서 꺼내와야 한다. 누군가 죽기를 바라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라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과 거리가 가장 먼 오늘 꺼내야 하는 것이다.
저자가 ‘투투(할머니를 가리키는 하와이 말)’를 떠나보내는 경험에 대한 글이 나와있다. 언뜻 보기에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지막을 함께 해준 장의사로서 본인의 가족을 보낼 때에도 체계적으로 잘 준비해서 보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첫 번째로 시신 참관실에서 저자가 마주한 투투는 저자가 그토록 반대하고 있는 방부처리를 당한 상태였다. 두 번째로는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돌보았던 가족이 시신을 자유롭게 만지는 걸 보면서, 그 옆에 어색하게 서 있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고 한다. 평상시에 일로써 마주해 왔던 시신들과 눈앞에 놓인 가족의 시신은 저자에게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장장의 다음 손님들에 의해 저자의 할머니를 보내는 장례 절차가 온전히 저자의 가족의 페이스대로 진행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신 참관실에서는 다른 대규모의 가족을 들이기 위해 저자의 가족을 얼른 내보내려고 하였고, 방 바깥에는 대규모의 가족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장례지도사가 할머니의 시신을 화장로의 불길 속으로 굴려 넣을 때, 저자의 가족들은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지나오느라 다 모이기도 전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장례를 기존 절차대로 진행해 달라는 친척들의 부탁에 응하지 않고, 그냥 집에서 할머니를 모셨더라면 얼마나 달라졌을지 계속 생각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저자가 죽음을 많이 지켜보면서 본인만의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었기에 느꼈던 부분들일 수도 있고, 다른 친적들은 여기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의 이 경험은 죽은 사람을 보내주는 일은 산 사람들의 몫이고, 죽은 사람의 의견이 없다면 보내주는 사람들 간의 의견 차이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저자는 주로 장의 업체와 트러블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서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건 죽음을 미리 준비해 둔 당사자라고 생각한다. 살아있을 때 어떤 형태로 보내주었으면 하는지 말해준다면 저자처럼 더 잘 보내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을 덜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건 내가 현실적인 부분들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보낼 때 저자와 같은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가장 확실한 미래이기에 먼저 준비해서 손해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자 쓴 글인데, 내가 의도한 바가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요약하면 아직까지는 죽음이라는 소재가 주변인들과 쉽사리 꺼내기 쉬운 소재는 아니지만,
오히려 꺼내기 쉬운 타이밍은 죽음이랑 가장 먼 '오늘'이자 '지금'이고,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까)
이 타이밍에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준비해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