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죽음에 관하여」와 함께
표제의 제목은 이 브런치북의 전체적인 주제를 관통하는 내용이다.
「가장 확실한 미래 준비하기」는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보는 관점을 전하고자 시작되었다.
오늘은 무거워 보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하기에 아주 적당한 작품을 소개하려고 한다.
나는 웹툰을 꽤 많이 즐겨보는 편인데, 네이버 웹툰 중 ‘죽음’을 소재로 한 웹툰을 떠올리라고 하면 개인적으로는 「죽음에 관하여」와 「내일」 두 작품이 떠오른다. 물론 두 작품 외에도 죽음을 소재로 다룬 웹툰들은 많겠지만, 개인적인 취향과 관점을 반영해서 이 두 작품을 대표작으로 골랐다.
그리고 오늘은 1세대(?) 죽음 웹툰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죽음에 관하여」(이하 '죽관')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본 내용으로 들어가기에 주제와 관련 없는 TMI를 잠깐 꺼내보면, 죽관을 본 지 오래돼서 다시 한번 보려고 만화 카페에 갔는데 불행하게도 내가 간 만화책 카페에는 이 책이 없었다. 지금이야 많은 웹툰들이 단행본으로 나오고 있지만, 죽관은 많은 웹툰이 오프라인 서적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부터 단행본이 있었던 대표적인 작품이었는데.. 다른 만화 카페를 찾았더니 자리가 만석이여서 그냥 주변에 알라딘에 가서 단행본을 사버렸다. 단행본이 총 두 권밖에 안 돼서, 만화 카페 두 번 갈 돈을 아끼면 무제한으로 다시 볼 수 있는 단행본을 구매할 수 있다는 소소한 꿀팁을 전하며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삶에 관하여
오늘 소개하는 작품의 제목은 분명 「죽음에 관하여」이지만, 실제로 내용은 ‘삶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비로소 삶의 소중함을 한번 더 깨우치거나, 아니면 살아있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생각들이 작가님들의 상상력으로 채워져 흥미로운 이야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양한 에피소드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이,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죽음에 관심 가져야 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을 더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기에 죽음을 공부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삶을 더 소중히 하는 과정이 된다.
글 작가인 ‘시니’ 작가님은 소방서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기반이 되어 죽관이 탄생했다. 사람들이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때 가장 먼저 출동하는 소방관들과 함께 근무를 하셨기에, 한편으로는 죽음과 가까이에서 근무를 하셨던 셈인 거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채사장”이라는 작가님이 있는데, 이 분도 여행지에서 큰 사고를 겪고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한 후 느끼는 바가 많았다고 한다. 나는 아직 직접적으로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거나, 겪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작가님들의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고 간접 경험이지만 내 삶을 돌아보고 영향을 주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죽관을 다시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편은 9화이다. 내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가장 직설적으로 드러나 있다. ‘죽음은 그리 멀지 않다. 어렵지도 쉽지도 않고 그냥 곁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평균 수명을 근거로 죽음을 먼 미래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내일 내게 당장 죽음이 찾아온다면 평균 수명이나, 확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내 수명은 28살이 되는 것이고, 나에게는 100%의 죽음이 찾아온 것 일 텐데. 이 화는 짧지만 마무리가 더욱 인상적이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것이죠?’라는 등장인물의 말에 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어떻게 되었잖아?’라고 반문한다. 작품이기에 기대할 수 있는 일말의 반전가능성조차 허무하게 무너뜨려 버린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실제로 삶은 다시 시작이 없고, 죽음은 이보다도 더 허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이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이고 그만큼 소중하다.
신에 관하여
죽관이란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존재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신’의 존재이다. 무표정하고, 인간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며, 한 발치 뒤에서 관망한다. 그러면서도 간간히 괜찮은 사람들한테는 정을 붙이려는 살짝 츤데레 끼도 있다. 작가가 상상한 신의 모습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세 가지 종교에서 등장하는 신(또는 우상)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비교를 위해 우리나의 대표적인 세 종교의 신의 형상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기서 언급하는 신의 모습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 주면 감사하겠다.
우선 개신교와 천주교(교회/성당)는 같은 유일 신(하느님, 하나님)을 믿지만 두 종교에서도 신의 모습은 다소 차이가 있다.
먼저, 개신교의 하나님은 개입하는 신으로 여겨진다. 성경에서의 모습들은 기적을 일으키며 적극적으로 우리 삶에 개입했지만, 현대에서는 성경에서와 같은 기적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신자들에게는 작은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 같다.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개신교 신자 분들이 무언가를 이루거나 성취하면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지금도 개인의 삶에 작은 기적을 일으키며 개입할 수 있는 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천주교의 하느님은 개신교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지만, 개신교보다는 덜 적극적이다. 성경 안에서는 많은 기적을 일으켰지만, 현대에서는 역시 마찬가지로 큰 기적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은 무언가를 이루어내도 하느님께서 이루었다고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다. 성취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하느님에게 의지하고 기도를 하기에 덕을 신에게 돌리기는 하지만 직접 이루는 주체는 개인이 된다. 마치 팬분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고 하는 연예인과 팬클럽 같은 관계랄까.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천주교의 하느님은 응원하는 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부처님은 엄밀히 말하면 신은 아니다. 하지만 신자들에게 있어서 부처는 롤모델이고 우상이다. 부처님께 기적을 기대거나, 기도를 하지는 않지만 존재 자체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안내해 주고 수행을 하는데 참고할 수 있는 선생님 같은 존재랄까.
죽관에 등장하는 신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천주교와 불교의 신(또는 우상)의 모습과 닮아있지만, 닮은 건 이뿐이다. 그는 그를 찾아온 사람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답(교리)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답을 내리고 선택을 하는 건 온전히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그는 그 선택을 조용히 관망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정말 흥미로운 존재였고, 한편으로는 그의 존재가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죽관에 등장한 신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고 그래서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작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모습이라서 실존하는지를 물었을 때 기존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죽어볼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자 종교와 신을 만들었다. 죽관의 신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만화에서 나온 것처럼 삶을 정리할 기회가 있을지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만화에서 나왔던 주변인들에게 더 잘해줄걸 하는 후회, 서로를 위해 조심하는 것, 삶을 소중히 대하는 것, 기회를 소중히 하는 것 모두 살아서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앞으로도 우리는 죽음을 직접 체험해 볼 수는 없겠지만..
(겪는 순간 삶은 끝이나고, 삶이 끝나지 않는다면 그건 죽음이 아니다.)
이런 작품을 통해 다양한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고민하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
사후세계에서 신을 만나 삶을 정리할 기회가 없다면, 살아가면서 내면 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으면 된다.
이 글이 여러분들에게 죽음을 생각하며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