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편견을 깨다

영화 캡틴 판타스틱 속 죽음을 마주하는 방법

by 알레로그

누군가 나에게 살면서 본 영화 중 가장 재밌었던 영화를 묻는다면 엄청난 고민 끝에 결국 답을 못할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재밌게 봤던 작품이 너무 많아서 그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오히려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당장 이제까지 본 영화가 몇 편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확히 몇 편인지 답을 못하리라 생각한다.

(1~3번 본 것이 아니라면 누가 그걸 일일이 세면서 보겠는가?)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를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캡틴 판타스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만난 영화


영화는 보통 내가 보고 싶어서 아니면 주변 사람이 보고 싶어 해서 같이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캡틴 판타스틱'을 보게 된 계기는 조금 독특했다.

대학생 시절 한 교양과목에서 한국영상자료원(KOFA)에서 영화를 한 편 보고 후기를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수님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짜로 영화 상영했는지 하나하나 확인했을 것 같지는 않아 아무 영화나 보고 감상문을 썼어도 됐을 것 같지만 당시의 순진(?)했던 나는 순순히 영상자료원을 찾아가서 영화를 봤다. 그리고 내가 방문했던 그 시간에 상영했던 영화가 캡틴 판타스틱이었다.

처음 가보는 지역, 처음 가보는 공간, 영화관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낯선 환경, 사람이 없는 한적한 상영관에서 시작된 영화. 이 특별한 영화가 바로 '캡틴 판타스틱'이었다.


이 영화는 만남뿐만 아니라 내용도 내게는 특별했었다.

영화를 고를 때에는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간다. 내가 보고 싶었든, 다른 사람이 보고 싶었든, 혹은 다른 사람이 내게 보여주고 싶었든. 그렇기에 나는 영화를 볼 때 그 의도를 보면서 그 의도에 맞춰서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의도를 고민하면서 보는 편이다. 내가 영화를 골랐다면 보고 싶었던 장면이나 궁금했던 스토리를 위주로, 다른 사람이 보자고 한 영화라면 이 사람은 어떤 장면이나 궁금해서 이 영화를 보고 싶었을까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영화라면 이 사람은 이 영화를 왜 내게 보여주고 싶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료원에서 틀어주는 영화는 그러한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이 영화가 랜덤 하게 상영되는 건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상영되는 것인지 조차도 알 수 없었다. 교수님께서 굳이 KOFA에서 영화를 보라고 했으면 나름대로 선정되는 기준이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수업 시간에 굳이 손을 들어 질문을 하거나 KOFA 직원 분들에게 상영하는 영화들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물어보는 건 내 성격상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라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숨겨진 의도를 찾아보자고 다짐했고 그래서 한 장면도 놓치지 않기 위해 몰입해서 봤었다.


온전히 집중해서 본 영화는 나에게 생각할 소재들을 정말 많이 던져주었고, 편견을 깨게 하는 인상적인 장면들도 많았다. 우연한 계기로 보게 된 영화가 나에게 정말 많은 영감을 주었기 때문일까? 나는 앞서 막연하게 고민했던 질문에 답으로 KOFA 내 상영하는 영화는 일정한 기준이 있고, 교수님은 그런 영화를 학생들이 한 편 보기를 원했던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인이 추천해 주거나 또는 스스로 고르지 않았던, 우연히 지나가던 영화가 이렇게 큰 인상을 줄리가 없다.(고 믿고 싶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가 가장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인데, 스스로 또는 지인들이 재밌을 것 같다고 선택했던 영화들은 그저 재밌게 봤던 영화 하나 정도로 퉁 쳐지고 있다는 건 한편으로는 나나 내 지인들의 안목이 별로라는 반증이 될 수 있으니까. 낯선 공간에서 우연히 마주했다는 특수성이 이 영화를 더 특별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건 맞지만, 그 외에도 영화가 충분한 기준에 의해 선별된 괜찮은 작품이었기에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Sweet Child O’ Mine


영화의 내용이 궁금해서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쩌다 꺼낸 영화를 보게 된 계기만 잔뜩 늘어놓은 걸 보고 지루함을 느끼는 독자들의 눈총이 느껴지는 듯 하니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Sweet Child O’ Mine'이 노래가 유명한 노래라는 건 꽤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나는 이 노래를 캡틴 판타스틱에서 처음 접했다. 그리고 이 노래가 나오는 장면은 영화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다. 다만, 이 장면은 작품의 후반부 장면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스포가 될 수 있다. 혹시라도 스포일러를 정말 싫어하는데 영화를 볼 생각이 있다면 글을 멈추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다시 읽어주면 감사하겠다. (영화 얘기라곤 기껏해야 지금 ost 얘기가 하나 막 나왔는데, 과연 영화가 궁금한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https://youtu.be/cHSk606yFas?si=4yYzjFT3qyixe_qG

(이렇게 이 장면만 잘라 영상이 올라온 것을 보면 아마 내게만 최애 장면은 아닌 것 같다.)


이 장면은 죽은 엄마를 보내주기 위해 남편과 아이들이 노래를 하는 장면이다. 죽은 엄마는 기독교 집안의 사람이었지만, 당신은 불교신자로 살았기에 기독교 식으로 관에 넣어 매장되는 대신 화장을 해서 화장실 변기를 통해 자연으로 돌려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에 주인공 가족들은 그녀의 바람대로 화장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워 마침내 엄마의 시신을 얻어 불에 태우며 노래를 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하지만 영상의 분위기가 그렇게 우울하지는 않다. 각자 악기를 연주를 하다가 흥에 취해 춤을 추는 장면들도 찾아볼 수 있다. 가까운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분명히 슬픈 일이지만, 이 장면을 보면서 내가 죽은 후에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보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이별이 슬픔으로만 기억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 과정이 되기를 바란다.

이 씬의 마무리 부분까지 정말 잊지 못할 만큼 특별했는데, 엄마의 유언대로 정말 그녀의 유골을 변기통에 넣어 내려버린다. (변기가 막힐 수 있으니 아무리 유언이라 해도 유골을 넣고 내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역시 한국인이다.)


이 장면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첫 번째로 유골에 대한 편견이 무너졌다. 소중한 사람의 유골은 함부로 처리하기 어려울 수 있다. 자연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로 보내려고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바다에서 유골을 뿌리거나 자연에 무단으로 유골을 투기하는 행위는 불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은 유골을 납골당에 보관했었고 나에게도 이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보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내 유골은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다. 물론 죽은 나를 추억하기 위해 내 일부를 보관하고 그것을 보면서 나를 기억해 주려는 마음은 너무나도 감사하겠지만 그 사람이 누가 됐든 간에 나는 그 사람에게 그런 부담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내 유골을 변기에 넣어 내려줘도 좋고, 아니면 쓰레기통 혹은 일반 쓰레기로 처리가 어렵다면 음식물 쓰레기로 처리를 해주어도 좋다.

앞서 내가 제시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법에 저촉되거나 다른 사람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면, 모두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편하게 다뤄도 괜찮다. 죽은 나는 이미 육체를 잃었고, 내 육체 또한 불에 활활 타서 원래의 형체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남은 내 육체의 흔적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가며 조심히 다뤄지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를 통해 편견을 깨고 얻은 내 첫 번째 바람이다.


이 장면을 통해 얻은 두 번째 교훈은 내 첫 번째 바람이 결국 나만의 욕심이기에, 이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내 유골을 함부로 다뤄도 좋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유골까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렸는데 뭐 어떠냐고, 부모님의 유골을 나중에 변기에 넣고 내리자고 가족들에게 제안을 했다가는 등짝을 맞고 호적에서 파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내가 함부로 다뤄도 괜찮다고 얘기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함부로 다뤄달라는 부탁 자체가 그들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고인이 바라던 대로 해줘야지’라는 편견에 다시 갇히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도 아빠와 아이들은 엄마가 바랐던 죽음을 외가쪽 식구들에게 전했지만, 크리스천이었던 외가쪽 식구들은 그런 죽음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전통적인 교회의 행사 안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죽은 딸을 보내주게 된다. 개인적으로 내게 둘 중 어떤 방식으로 보내주었으면 좋겠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앞서 말했듯 즐거운 마음으로 나를 보내주기를 바란다. 내 장례식장은 나와의 이별을 기억하는 자리가 되기보단 살아서 함께 즐거웠던 시간을 추억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벤과 아이들처럼 죽은 사람의 바람을 들어줄 가치관을 공유할 사람들이 필요하다는걸 깨달았다.


내가 마주하고 싶은 죽음


한 때 커뮤니티를 떠돌았던 사진 중에, 친한 친구의 장례식장에 노란색 옷과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장례식장을 찾았던 친구가 있었다. 두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서로의 장례식장을 가게 된다면 웃긴 복장을 입고 가서 서로를 웃겨주자고 약속했던 거다. 나는 이 일화를 좋아한다. 죽음을 어둡게만 바라보지 않고, 죽기 전 약속했던 것을 살아남은 친구가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사진 속에서는 그런 분장을 한 사람이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은 나는 설령 진실로 친구와 그런 약속을 했더라도, 다른 사람이 우리의 약속을 모르는데 괜히 이런 복장을 입고 갔다가는 유가족들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우리의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될 것 같다.

그래서 내게 떠오른 방법은 여러 명과 약속을 하는 거였다. 이런 가치관을 공감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곁에 두어 한 사람이 부담을 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서 나눠서 짊어질 수 있도록 미리 이야기를 해두는 거다. 그렇게 나와 이별하는 내 장례식을 내가 원하는 취향으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들을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내 마음과는 반대로, ‘내 장례식이 어땠으면 좋겠다’, ‘내 유골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와 같은 이런 바람들 자체가 내 장례를 치러줄 남은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는 건 그만큼 그에게 부담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남아있는 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점은, (지금까지의 내 삶을 기준으로) 나는 살면서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났었고 그 덕분에 행복했었다는 사실과 그런 그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위시리스트(?)들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내고, 이별의 자리가 슬픔보다는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어본 것들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건 절대적이지 않다. 이미 죽어버린 나의 바람보다 우선 시 되어야 하는 건 남아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내 위시리스트가 오히려 부담이 된다면 당연히 지키지 않아도 된다. 이별의 슬픔이, 함께 했던 즐거웠던 기억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면 당연히 슬픔이 가득한 자리가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내면서까지 굳이 죽어버린 나의 바람을 지킬 필요도 없다.


이건 그저 한 영화를 보고 ‘이런 죽음도 있을 수 있구나’ 하며 편견을 깬 나의 작은 죽음 취향일 뿐.

죽음은 원래 산 사람들의 몫이기에 그들에게 편안한 방식이라면 내게도 위안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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