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죽음

숨겨진 시체들과 죽음을 마주하는 것에 대하여

by 알레로그

오늘은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적어보려고 한다. 이 생각을 구체화하기 위해 한 여자 장의사가 쓴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책의 도움을 받았다.


죽음은 어째서 부정적인 개념이 되었을까? 삶의 마지막이라는 관점으로 봤을 때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걸까? 영화나 소설이 그 결말에 도달했을 때, 이야기가 더 진행되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생길 수는 있지만 ‘결말’이라는 것 자체가 나쁘거나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나는 죽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생의 결말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죽음을 꼭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삶을 더 소중하고 특별하게 만드는 게 바로 죽음이다.


우리는 이런 죽음을 왜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을까? 나는 그 시작을 죽음의 결과 중 하나인 ‘시체’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이,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는 게 먼저인지, 시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게 먼저인지도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보이지 않는 시체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살면서 한 번쯤 듣게 되는 속담이다. 하지만 이 속담은 틀렸다. 사람도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 모든 죽음은 생명의 껍데기인 시체를 남긴다. 단지, 인간들의 시체들이 오래전부터 사회 안에서 숨겨져 왔을 뿐이다.


나는 이 숨김이 죽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사회 안에서 시체가 숨김으로 인해서 시체는 우리 삶에서 익숙하지 않은 피해야 할 것이 되었고 그로 인해 죽음과도 일종의 거리감을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당신은 죽은 사람을 직접 본 적 있는가? 매일매일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고, 회사 내 게시판에서도 매일 같이 직원들의 친지들이 돌아가셨다는 부고장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이런 수많은 죽음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이제까지 죽은 사람을 직접 마주한 것은 단 한 번뿐이다. (이것 조차도 올해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에서는 ‘오늘날, 시체를 억지로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선진국에서만 누리는 특권’이라고 이야기한다. 직업 상 죽음과 가까이 있는 직업이 아니라면 현대 사회에서는 시체가 철저하게 감춰지고 있기 때문에 마주할 일이 거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마주할 일이 없기에 시체와 죽음은 우리 삶에서 더욱 낯설고 무거운 것이 되어버린다.


과거를 생각해 보면 현대와 같은 인프라가 구축되지 못한 시대에서는 전염병이나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나면, 시체를 철저히 감추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시체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혹은 죄를 지은 사람들을 처형하는 과정을 대중에게 보여주거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처형의 결과를 공개적인 장소에 전시하는 행위도 이루어지곤 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시체를 우리 삶에 눈에 띄는 곳으로 다시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생명이 꺼지고 난 후의 사람은 생기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부패하면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달라서 우리에게 많은 충격을 가져다줄 것이다. 아마도 사회가 철저하게 이를 감추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에서 저자가 죽은 사람을 방부처리 과정을 설명하면서 묘사했던 시체의 모습은 글로만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그려지면서 상상하고 싶지 않은 그림이 그려졌다.


시체가 숨겨진 현대사회에 사는 나는 숨겨진 시체들이 죽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숨겨지기 전 사회 안에 드러난 시체들은 그 모습을 숨겼을 때보다 죽음을 부정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했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죽고 난 후 시간이 지난 우리의 모습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다면, 시간이 지나지 않은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괜찮을까? 책 속에는 저자가 죽음을 처음 목격했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저자는 8살이 되어서야 누군가가 죽는 순간을 목격했다는 것이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해도 죽음을 목격하지 않은 아이를 찾는 게 더 어려웠을 거라고 말을 하면서도, 당시에 목격했던 사건이 한동안 그녀를 악몽을 꾸게 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죽음의 목격이 그녀에게 꽤 큰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었단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놀랍게도(혹은 운이 좋게도) 나는 지난 27년간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 하지만 죽음을 목격함으로 인해 겪는 트라우마는 나이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것 같다.


요즘에는 지하철을 타러 가면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스크린 도어를 볼 수 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스크린 도어는 모든 지하철역에 있지 않았다. 달려오는 지하철에 몸을 던져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을 예방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누군가가 몸을 던짐으로 인해 불특정 다수에게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이런 트라우마는 어디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걸까?

지하철 사고 같은 경우는 사실 죽음 그 자체의 순간보다는, 지하철과의 충돌로 인한 육체의 훼손이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것 같아 보인다. 만들어진 장면이지만 쿠팡플레이의 좀비물이었던 ‘뉴토피아’의 지하철 장면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끔찍했던 장면 중 하나였다. 이런 걸 보면 피가 튀거나 신체가 절단되거나 하지 않으면 괜찮은 걸까 싶기도 하지만, 이태원 참사 때의 영상을 보고 충격과 트라우마를 받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런 글을 담담하게 적고 있는 나는 이런 죽음들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침착하게 바라보면서 아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종종 창문을 통해 바깥 경치를 보고 있다가도 그 순간에 우연히 옥상에서부터 몸을 내던진 사람이 있을까 봐, 그리고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칠까 봐 시선을 거두곤 한다. 실제로 그런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 만약에 눈이 마주친다면 나는 과연 그 결과를 보기 위해 창문 밖을 내려다볼까? 아니면 잘못 본 것이라고 나를 속이며 못 본 척 일상으로 돌아갈까? 이런 고민과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이유가 아직 죽음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이걸 준비하고 마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이 글에서 다루었던 주제들은, 내가 상상만으로 떠올리기만 했던 그 순간(죽음)을 현실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무너지지 않을 이유를 찾고자 고민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죽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내가 그걸 마주하는 것도 피할 이유는 없는 거니까. 한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을 항상 나쁘게만 바라볼 필요는 없는 거니까. 나는 이런 근거들을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것처럼, 죽음은 삶의 마지막 단계로 꼭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이유는 모든 죽음을 포용하지 못한다. 죽음이 원하는 순간에만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싶은 형태로만 마주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죽음은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고 부정적으로 만든다. 내가 모든 죽음을 컨트롤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죽음만큼은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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