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의 주인과 권리에 대하여
앞서 나의 첫 죽음 서적을 소개하며, 책의 내용을 너무 추상적으로만 소개를 했던 것 같아서 다른 독자들도 책의 분위기를 알 수 있도록 책에 등장했던 인상 깊은 사례들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다.
살릴 의무
책에서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으로 소개를 하고 있으며,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으로 소개되었다. 개요는 이렇다. 한 남성이 술을 마시고 넘어져 머리 손상으로 보라매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뇌출혈 상태가 심각한 것을 인지한 의사가 바로 수술을 진행했고 수술은 무사히 잘 마치게 되었다. 다만, 남자의 가정형편은 병원비를 감당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고, 수술 후 입원한 상태로 안정이 필요했던 남성은 가족의 항의 끝에 이른 퇴원을 하게 된다. 퇴원을 한 남성은 집에 도착해 인공호흡기를 떼자마자 사망에 이른다.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고, 뇌수술 후 바로 퇴원을 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경찰이 검찰에 사건을 의뢰하게 되고 검사는 퇴원 서류에 사인을 했던 의사, 레지던트 그리고 인턴까지 기소를 한다. 결과적으로 의사와 레지던트는 살인 방조죄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고, 이는 다른 의사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의사들이 회생가능성이 있는 환자는 보호자가 아무리 요구하더라도 퇴원을 시키지 않는 입장을 고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목숨의 주인
내 목숨의 주인은 누구일까?
다소 갑작스러운 질문이지만 죽을 권리에 대해 논하기 전 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마다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단어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논의에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에 먼저 단어들을 먼저 정의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주인'은 네이버 사전에서 “대상이나 물건 따위를 소유한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목숨은 일반적으로 물건으로 구분되지는 않으나 본 논의 안에서 생명을 대상화 혹은 물건화 한 무엇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즉, 목숨의 주인은 사전적 의미에 따라 목숨을 소유한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소유'의 사전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역시 네이버 사전에서 검색하면 첫 번째 뜻으로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두 번째 뜻에서 물건을 전면적·일반적으로 지배하는 일이라고 정의된다.
따라서 소유의 첫 번째 의미만 봤을 때 목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목숨의 주인은 내가 된다.
그러나 소유의 두 번째 의미까지 확장시켰을 때, 과연 나는 내 목숨을 일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지 고민해 볼 여지가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유교 사상에서는 부모님으로부터 몸을 소중히 하는 것을 효의 시작으로 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몸이지만 유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내 몸을 일반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기에 소유의 두 번째로 확장시켜 적용한다면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게 된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으로 물려받은 생명 또한 온전히 나의 의도 안에 지배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교 사상 안에서 목숨의 주인은 내가 아닐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유교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유교의 가르침이 지배적인 상황은 아니기에 관점을 바꿔보자.
사람이 태어나기 위에선 두 생식 세포가 만나서 수정란을 이루고, 수정란이 착상하여 어머니의 몸 안에서 약 10개월간의 성장기간이 필요하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온전하게 우리의 목숨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일부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태아의 생명을 온전히 태아의 몫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생명의 시작 또한 수정란에서부터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각 임신 단계로 나누어 특정 시기부터 생명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각자의 주장이 있다. 어떤 주장이 되었든 어머니 몸 안에 있는 태아는 스스로의 생명을 지배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앞서 논의했던 내용에 따라 우리는 이 시기에 목숨이 주인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몸을 벗어나 태어난 후부터는 온전한 목숨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목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갓난아기 시절, 부모의 도움 없이는 목숨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이 시기 또한 목숨의 주인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스스로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목숨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배할 수 있는 목숨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죽을 권리
무언가를 '지배'한다는 건 다시 네이버 사전의 설명을 빌려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 조직, 사물 등을 자기의 의사대로 복종하게 하여 다스림”을 의미한다. 즉, 본 논의 안에서 목숨의 주인이 된 우리는 이 목숨을 스스로의 의사대로 유지하거나 꺼트릴 수 있다.
정말로 우리에게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걸까? 책에서 소개된 사례들과 함께 조금 더 고민해 보자.
책에서 소개된 사건 중 하나는 2008년 김할머니 사건이다. 당시 건강했던 할머니가 기관지 내시경이라는 일반적인 검사를 하던 도중 식물인간 상태가 된 사건이 있었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열심히 간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과연 이게 정말 어머니가 원하던 마지막인지 고민하게 되었고, 병원에 퇴원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브란스병원 측에서는 이를 허가해주지 않았고, 가족들은 결국 법에 호소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법원에서는 긴 시간 끝에 환자의 상태를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로 보고 연명의료가 무의미한 침해 행위에 해당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김할머니는 국내 첫 존엄사 사례가 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법원은 의사협회에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지침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겠냐며 필요성을 제기했고, 저자를 포함하여 대한의사협회 여러 의사들이 TF팀에 참가하여 오랜 수정과 토론 끝에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 상정된 다음 법제화되었다고 한다.
이 사례에서 보면 김할머니는 분명 스스로 목숨의 주인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의식을 잃어 목숨을 온전히 지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장 가까웠던 가족들의 의견을 빌려 어머니께서 원하신 마지막은 이게 아니었다는 의사를 표현할 수는 있었지만, 평소 주변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만약 의식을 잃게 된다면 그때에도 내 목숨의 주인이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내 가족과 주변인들은 과연 내가 원하는 마지막을 알고 그대로 내 목숨을 다뤄줄 수 있을까?
책에 소개된 다른 한 사례를 소개하면, 김수환 추기경의 일화가 있다.
김할머니 사건이 재판에 회부되어 있는 와중에 김수환 추기경께서 돌아가셨다. 추기경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연명치료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고 한다. 그는 가톨릭병원 의사들에게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이미 신을 만나러 갈 준비가 다 되었고, 하느님을 만나는 게 기쁠 뿐이다. 그러니 내가 혹시 쓰러지더라도 애써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 번 추기경께서 폐렴 때문에 호흡을 멈췄고, 의사들은 반사적으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그렇게 추기경께서는 천신만고 끝에 다시 깨어나셨지만, “고맙다. 하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이제 안 해도 된다. 나는 하느님께 갈 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추기경께서 다시 한번 호흡을 멈췄을 때 그는 비로소 하느님 곁으로 갈 수 있었다.
두 번째 사례에서는 추기경께서 연명치료를 더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의료진들은 환자들이 호흡을 멈추었을 때 조치해 오던 관성에 의해 심폐소생술을 수행했다. 그다음에는 의사들이 추기경의 뜻을 존중하여 추가적인 연명치료를 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 후에도 환자의 의견을 묵살하고 연명치료를 했었다면 어땠을까?
목숨의 소극적인 주인
앞서 소개한 사례들은 모두 스스로의 목숨을 적극적으로 끊어내는 상황이라기보다는 다가오는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안에서는 목숨의 주인인 우리가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한다면 주변에서는 우리의 의견을 존중하여 원하는 마지막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즉,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고 이는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적극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아쉽지만 추후 다른 글을 통해 다뤄보려고 한다.
적극적 죽음을 제외하더라도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목숨을 온전히 지배할 수 없는 상황이 마주하게 된다. 김할머니의 사례처럼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게 되어 의사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상황 혹은 김수환 추기경께서 분명히 의사를 표현했음에도 주변에서 연명치료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상황은 나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이는 내 지배를 벗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소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때로는 이 소유권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는(내 목숨을 지배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음을 알 수 있고, 나는 이런 소유권을 소극적인 소유권이라고 부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