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하여

우리는 목숨의 능동적인 주인일까?

by 알레로그

지난 “죽을 권리와 살릴 의무”에서 적극적으로 목숨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나중에 다루고자 미루었는데, 당시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셸리 케이건 교수가 특정한 조건 안에서는 자살도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주장을 접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살’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하고 자살에 반대하지만, 이런 대부분의 생각에서 벗어나 저자만이 갖고 있는 논리로 이를 어떻게 판단하고 평가했는지 궁금했었다. 그래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모두 읽고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고, 해당 책을 완독한 이제야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먼저 간단한 내 개인적인 견해를 적어보면, 셸리 케이건의 주장처럼 때로 ‘자살’은 합리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논리적인 전개에 설득이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나의 생각의 뒷받침되는 기반은 우리가 가진 생명의 가치가 자살 반대를 주장할 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살을 합리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해서 내가 나중에 자살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이 자살을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할 수 있으며, 그런 판단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정도의 주장이지, 내 삶에 적용해 봤을 땐 자살이 내가 겪고 있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 어떤 상황이 와도 적극적인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 같다.


죽음은 산 사람의 몫


네이버 웹툰에서 ‘죽음’하면 떠오르는 웹툰 중 하나는 바로 ‘내일’이라는 웹툰이다. 웹툰은 저승사자(차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위기에 놓인 부정적 감정 수치가 높은 사람들을 찾아,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놓치고 있던 소중한 긍정적인 존재를 일깨워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에피소드 형태의 웹툰이다. 긴 기간 연재된 작품이기 때문에 정말 많은 삶을 다루고 있고 그래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에, 또 죽음 안에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꼽으라고 하면 ‘시차’이다. 에피소드 주인공이 웹툰 작가라는 점에서 뭔가 실제 작가님의 자전적인 이야기 혹은 다른 웹툰 작가분들의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어 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 동시에 이 에피소드를 웹툰의 형태로 접하고 있었기에 이 현실감이 내 F세포를 더욱 자극했던 것 같다.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 포인트들이 더 있는데, '선택'에 관한 이야기와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죽고 나서 장례식을 사전에 체험하는 연출이다.

주인공은 매주 마감일정을 지키기 위해 일반적인 직장인들의 주말 같은 시간을 갖지 못했다. 가족,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내지 못하게 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온전히 주인공이 웹툰작가라는 직업을 택함으로써 겪게 된 현실이었다. 개인이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선택들의 결과를 온전히 감당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의 결과를 완전하게 미리 알고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로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마주할 때 개인은 쉽게 무너지기도 하니까.

그렇게 무너져버린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 중 하나가 바로 자살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주인공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쉽게 목숨을 포기하려고 했고 그로 인한 결과를 저승사자들이 미리 보여줌으로써 주인공은 후회하고 선택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웹툰이라서 얻을 수 있는 기회였고 현실에서는 죽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다. 이 에피소드에서 나왔던 대사는 아니지만, 웹툰 속에서 죽음은 언제나 산 사람의 몫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나는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할 때, 개인이 선택한 결과를 책임지려고 자살을 택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작 중 나왔던 이 대사가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죽음의 결과는 언제나 살아남은 사람들이 감당한다. 그래서 자살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지는 행위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주변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최악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


나의 개인적인 생각에 덧붙여 전문가들의 자살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의 저자인 유성호 교수는 자살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살이 개인만의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해서 자살을 하는 게 아니고,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 문제이며 이는 사회적 요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으니 우리 사회가 이런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실행한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살고 싶은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셸리 케이건 교수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을 만족한다면 자살은 충분히 윤리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주장한 몇 가지 전제 조건을 처음 봤을 땐 간단하게 보였지만 생각을 곱씹어볼수록 꽤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몇 가지 조건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자살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살로 인한 결과를 온전히 이해한 상태에서 스스로의 죽음에 동의해야 하며, 이러한 동의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깊게 생각해 보면 세 가지 모두 꽤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들이며, 나는 이 중 ‘자살로 인한 결과를 온전히 이해한 상태’가 제일 달성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생각한다. 앞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선택들을 계속해서 마주하게 되고, 때론 예상하지 못한 선택의 결과가 개인의 삶을 무너뜨리기도 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자살도 그러한 선택 중 하나라고 했을 때, 과연 개인은 자살로 인한 결과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선택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자살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까지 삶이 궁지에 몰리지 않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자살의 결과를 온전히 이해하는 상태가 가장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남은 두 조건들이 달성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삶에서 선택을 할 때, 항상 자유로운 상태에서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삶의 시작도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선택지들도 내가 바라는 선택지만 있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선택하는 것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부분 때문에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라고도 불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인 상황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환경에 놓인다는 건 바꿔 말하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압박을 받는 것일 테니까.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목숨의 주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의 결과를 온전히 책임질 수 없다. 셸리 케이건은 합리적인 자살을 하기 위해서는 그 선택을 했을 때의 결과를 충분히 이해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도 그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이미 궁지에 몰린 개인에게 선택의 결과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스스로의 목숨이 주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 관계를 통해 부모님, 형제, 친구들 서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줄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관계 맺고 있는 주변인들의 생명도 조금씩 앗아가는 행위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권리를 행사할 생각이 없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래에 내가 마주할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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