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백

아다지오의 계절 '여름'

더위가 남겨준 느린 리듬과 삶의 여유

by 유앨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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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위가 찾아올 때마다 드는 생각

아침부터 무더위가 온 몸을 감는 날이면 그날의 흐름 자체가 달라집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은 보통이면 하루를 여는 반가운 신호지만 한여름에는 너무 버겁게 다가옵니다. 뜨거운 햇살에 공기 자체도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듯합니다. 집밖에 나서는 순간부터 머릿속은 무거워지고 몸의 반응도 둔해집니다. 가볍게 일어나 준비하던 출근시간도 더운 날 만큼은 단단히 준비해야 합니다. 손수건도 챙기고, 땀으로 옷에 지도를 그리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해야만 하죠. "괜찮겠지" 생각하며 셔츠 단추를 채우고 나온지 1분도 안돼서 바로 풀어헤치게 됩니다. 시계를 보며 출근시간에 맞춰야 한다는 건 알지만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몸은 저만치 뒤처진 듯 따라가지 못합니다. 더위는 하루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저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2. 느려지는 생각

더위가 가장 먼저 마비시키는 건 저의 '사고(思考)'입니다. 출근길에 머리는 OFF상태가 되고, 책상 앞에 앉아도 집중이 쉽지 않습니다. 이에 해야할 일들이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겹쳐집니다. 머릿속은 눅눅한 습기 속에서 잘 돌아가지 않는 낡은 기계처럼 멈칫멈칫합니다. 평소라면 작은 자극에도 번뜩 떠오르던 아이디어가 더위 속에서는 하얀 칠판만 남아있는 기분이 듭니다.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점점 쌓이는데, 손끝은 멈춰 있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생각의 속도를 내려놓고 더위 때문에 늦춰진 리듬에 맞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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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거워진 몸

머리에 이어 물바다로 변해버린 몸은 거진 폐업 수준입니다. 가벼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고 걸음마다 속도가 느려집니다. 평소라면 금세 해치웠을 집안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단순한 동작 하나에도 곱절의 힘이 듭니다. 땀이 배어 나오면서 난이도는 배가되는데요. 피부는 끈적이고, 옷은 점점 무거워집니다. 그 무게 때문에 몸은 더 둔해지고 모든 게 귀찮음으로 변해갑니다. 결국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몸은 자연스럽게 움츠러듭니다. 여름의 더위는 일상의 작은 동작들까지 무겁게 만들고, 반대로 평소에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며 살아왔는지를 아이러니하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4. 주변의 풍경도 달라진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온 세상이 슬로우비디오처럼 보입니다. 아지랑이 때문에 멀리 있는 것들은 흐리게 보이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던 회사원들도 햇볕 앞에서는 슬로우템포로 가게 되죠. 작은 그늘이라도 보이면 삼삼오오 모여들고, 버스 정류장에서는 누군가 부채질을 하거나 음료수를 홀짝이며 버텨내고 있습니다. 바람이 멈춘 거리 위로 매미 소리만 크게 울려 퍼질 때면, 도시 전체가 '아다지오'가 된 느낌입니다. 괜히 자동차의 소음조차 더 무겁게 들려서 짜증도 치솓게 되는 건 이제 여름의 일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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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더위가 주는 역설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더위 속에서도 한 가지 깨닫는 건 이 느려짐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생각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억지로 밀어붙이기보다, 잠시 멈추어 있는 것도 방법이라는 걸 배웁니다. 몸이 무겁다고 해서 나를 탓하기보다, 그 무거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더위는 강제로 절 멈추게 하지만 그 멈춤이 결국 제게는 또 다른 쉼표가 되기도 합니다. 한 박자 늦춰진 호흡은 그동안 쉴 틈 없이 달려온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줍니다. 여름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삶의 속도를 재조정해주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6. 이러다 겨울이면 여름이 또 그리지겠지요

지금은 지긋지긋한 무더위지만, 겨울이 오면 또 이 뜨거운 계절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두꺼운 패딩에 몸을 파묻고 새하얀 눈밭을 바라보면, 언제든 가볍게 나설 수 있었던 옷차림과 짙푸른 산과 들판이 그리워질 테지요. 무더위가 있을 때는 차가운 공기여름이면 겨울이 생각나고, 겨울이면 여름을 떠올리는 이 반복은 어쩌면 삶이 주는 소소한 재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재가 있어야만 더 깊이 느끼게 되는 일상의 가치처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같은 생각을 반복하는 제 모습 속에서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늘 다르지 않은 그 생각조차 매년 반복되기에 인간미가 완성되는 것 같습니다


7. 무더위 속에서 체득하는 여유

더운 날씨는 머리와 몸을 동시에 느리게 만들지만, 그 느림 속에서 오히려 작은 여유를 배웁니다. 평소 같으면 지나쳤을 순간들이 눈에 들어오고,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들이 다시 붙잡힙니다. 지긋지긋한 여름이 언젠가는 그리움이 되는 것처럼 계절의 무게와 부재는 늘 다른 계절을 향한 그리움을 불러옵니다. 여름 속에서 겨울을, 겨울 속에서 여름을 떠올리는 제 모습은 어쩌면 인간적인 반복 그 자체일 것입니다. 결국 더위가 남겨주는 건 고통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숨 고르기를 배운 경험입니다. 언젠가 다시 불어올 바람과 함께 이 느림은 또 다른 힘이 되어 제 삶을 단단히 지탱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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