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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책미인 앨리 May 28. 2023

물의 공주

< 단수 피해는 진행형 >


공휴일 늦은 아침, 다른 날과 여념 없이 몸은 반사적으로 화장실로 향했고 볼일을 봤다.

앗! 화장실 물은 시원하게 내려갔고 손을 씻으려고 세면대 꼭지를 튼 순간, "어, 어!" 콸콸 나오야 하는 물이 나오지 않았다. 한 방울도. 방송에서 미리 물이 단수된다는 안내가 없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리둥절했다. 화장실에서도 부엌에서도 물이 나올 수 있는 곳, 모두가 막혔다. 절수도 아니고 단수도 아니라 흐르던 물이 멈춰버렸다.


올 1월에 주말 서울 곳곳에서 수도관이 파열돼 주민 약 340세대가 단수로 불편을 겪었다. 13일 오후 4시경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세검정로에 있는 한 아파트 인근에서 상수도관이 파열돼 약 300세대가 14일 반나절 동안 단수 피해를 입었다. 14일 오전 8시경 서울 성동구 왕십리역 오거리 인근 동북선 도시철도 공사현장에서도 상수도관 파열로 누수가 발생하며 일대 40세대에 수돗물이 끊겼다. 이날 오후 4시 넘어서야 복구 작업이 완료돼 인근 주민과 상인 등이 불편을 겪었다. 성동구청 근처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채영근 씨(51)는 “물이 나오지 않는 바람에 이미 받아뒀던 예약을 다 취소하고 점심 장사를 접었다”라고 하소연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최근 급격한 기온 변화로 (상수도관) 이음새가 벌어지면서 파열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더 적극적으로 시설을 점검해 시민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라고 말했다.


가끔 뉴스에서 보도되는 수도관 파열로 인해 주민들이 단수로 불편을 겪을 때 안타까움이 나왔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겪지 않다 보니 홀대했다. 그런데 어제 그것도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부터 아파트 전체에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서 주민 모두 큰 불편을 겪었다. 새벽 6시에 방송되었다는 안내를 경청한 주민은 거의 없었고 단수된 물에 대한 사건도 주민이 아침에 물이 나오지 않아 관리실에 자초지종을 말하고 방송해야 하지 않냐고 말하고 난 뒤 조치한 일이었다. 문제는 수도관 파열도 문제지만 공휴일이라는 점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부터 대체휴일까지 겹치면서 휴가 가는 사람이 많았다. 수도관 관리 사람 또한 대부분 휴가 간 상태라 손봐줄 전문가가 없었다. 또한 노후된 아파트 수도관 파열로 지하실 물이 차 물이 어느 정도 빠져야 원인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쪽에서는 물을 받느라 야단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성이 오가며 누가 누가 소리가 큰지 싸웠다. 불같이 화를 내는 주민들을 달래야 하는 아파트 소장은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한 지역에 큰일이 났을 때 나 몰라라 했던 수많은 공직자 사람이 생각났다.


집집마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손에 양동이를 하나씩 들고 물 받기 위해 서있는 행렬은 뉴스에서 종종 보던 단수 피해자들 모습이었다. 물이 나오지 않다 보니 정신적으로 모두 예민해졌다. 양손에 찜통을 들고나갔던 남편은 물을 나르다 흘렸는지 앞모습 전체에 물을 흘린 자국이 있었고 휴대폰마저 물에 젖어 성난 코뿔소 콧김처럼 뿜어 나왔다. 새벽 일찍 절에 갔다 와 오후 늦게 도착한 주민 몇몇은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했다. "아니, 무슨 일이에요? 거기 물이 좋아서 줄 서서 물 받아오나요?" 하며 엉뚱한 질문을 했다. 하긴, 사람마다 양손에 양동이를 들고 나르고 있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사람은 황당하기만 했다. 물 나르는 일은 밤늦도록 계속되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해결될 거라는 작은 희망으로 밤을 보냈다. 그러나 그 작은 희망은 잠시 자물쇠로 채워졌다. 여전히 물은 나오지 않고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다. 오늘은 또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 출처: 알라딘 도서 -


우리나라는 물 부족 국가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물 부족 국가라는 생각을 의심하지 못한 채 물을 마음껏 사용하고 있다. 갑자기 단수가 되어보니 물의 중요성이 더 와닿았다. 수많은 물 부족 국가에서 겪고 있을 일이 생각났고 방송에서 물이 부족한 나라에 도와달라고 구원의 손길을 보낼 때마다 '설마'라는 생각이 현실에 나타나면서 우리나라 전체에 단수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본다.


수전 베르데가 쓰고 피터 H. 레이놀즈가 그린 그림책 《물의 공주》은 조지 바디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조지 바디엘은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태어나 유명한 패션쇼 모델이자 조지 바디엘 재산의 설립자다. 현재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물의 공주》는 날마다 물을 뜨기 위해 수 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던 이야기다. 아프리카 왕국의 기기 공주는 깨끗한 물을 마을 가까이 불러올 수 없어 매일 어두컴컴한 새벽에 일어나 엄마와 함께 멀리까지 물 뜨러 간다. 항아리를 채우는 물은 깨끗한 물이 아닌 누런 흙탕물이었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한 기기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며 힘을 채운다. 그리고 수정처럼 맑은 물이 끝없이 흐르는 아프리카를 꿈꾸며 잠든다. 물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도 싫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손쉽게 나오는 현실에 물이 부족하거나 아껴야 한다는 인식은 미미하다. 결국 단수라는 피해를 겪어봐야 물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수도관 파열로 물 없는 삶이 얼마나 불편한지 피부로 느끼며 지금도 물 없는 삶을 살아가는 아프리카 사람에게 필요한 건 작은 관심과 도움이라는 사실을 느껴본다. 더불어 우리나라 또한 물 부족 국가임을 상기한다. "관리실에서 알립니다. 단수되었던 물은 이제 공급이 되니 그동안 불편했던 점 죄송합니다."라고 작은 구멍으로 흘러나오는 반가운 목소리가 지금 절실하게 다가오지만 아직은 단수 피해는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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