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단하신 언니
삼십 대의 나는 순진했었다.
그런데,
본인은 정말 다 안다고 생각했으니
정말이지 순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국인 모임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맘 맞는 한국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좋지만,
한국인 모임에 나가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뿐이라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사회적 인간이 되려고
빠지지 않고 가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 한국인 모임의 주축은 대부분이 여자 아줌마들이었다. 나 포함.
유학생들이 많은 지역도 아니거니와
대부분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해서 할 수 없이 이 외진 곳에 살수 밖에 없는
한국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는 영국 어학원에서 만나고,
누군가는 파리 대학에서 만나고
누군가는 밀라노 일터에서 만났지만,
이제는 이탈리아 시골에 모두 각자의 가족을 만들고
보일 듯이 보이지 않게 흩어져 사는 사람들.
나는 그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들었었다.
상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야기를 해 보면
이상하게 괴리감이 생겨서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중
좋게 말하면 굉장히 활발하고
또 안 좋게 볼라치면 좀 기가 센 나이 많은 언니가 있었다.
이 언니야말로 정말 뜨악하는 부분이 꽤 많았었다.
"나는 우리 애들 진짜 어렸을 적에 말 안 들으면
뺨을 때려버렸어."
라고 굉장히 당당하게 말한다거나,
"우리 시어머니는 참, 이상해.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 이불 정리를 안 한다고 그렇게 잔소리였어. 그게 뭐 어때서."
라는 전혀 납득가지 않는 말을 당연한 듯이
말한다거나, 그랬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언니의 남편은 비교적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어쨌든,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차가 벤츠인데 홧김에 집을 나가다가 대문에 긁혀버렸다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고,
본인 젊었을 적 사진이라며
잘 차려입고 선글라스를 쓴 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모두에게 돌아가며 보여 주었다.
직접 말은 안 했지만,
왠지
"아, 정말 미인이셨네요."
라는 말을 안 하면 혼날 것 같아서
영혼 없이 멋쟁이셨네요를 반복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언니들 말로는
원래 그 언니 집도 부자여서
남편과 같이 이탈리아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아주 잘 됐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럭저럭 잘 되고 있다고.
그러면서도 다들 그 언니가 눈 앞에 없으면
"저 언니, 애들이 불쌍해."
하고 눈을 흘겼다.
그 집 남매는 이미 고등학생, 대학생이었는데,
둘 다 너무나 미인, 미남이어서 깜짝 놀랐다.
언니와 언니 남편을 봤을 때,
도대체 계산이 되지 않는 도출 결과라...
그리고
처음엔 둘이 애인인 줄 알 정도로 스킨십이 각별한 것도 특이했다.
몽상가에서나 보던 장면이라
유럽 젊은 애들은 원래 저런 건가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잠시 했었다.
보통은 저 나이가 되면
이런 어른들 모임에 잘 따라 나오지 않는데.
그 언니는 자식들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애들은 이런데 같이 안 오면 아주 혼줄이 나거든.
아직도 얼마나 내 말을 잘 듣는지 몰라."
그 언니와의 강렬했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나나 했는데,
몇 달 후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오래 산 언니가 이 지역으로
모임 멤버 중 몇 분을 초대했고,
그중 한 명이 그 언니였다.
엉겁결에 모두가 우리집에서 잠깐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언니는 무슨 살인 사건 탐정처럼
집안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아빠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
거실 책장에 부친의 책이 몇 권 꽂혀 있었는데
매의 눈으로 그걸 발견한 언니는
"어머, 이거 아빠가 쓰신 거야?"
라며 눈을 과하게 반짝이더니,
바로 작가 양력 펴고 읽기 시작했다...
"아, 여기 출신이시구나.
아, 여기 나오셨구나."
그리고 언니는 바로 심드렁해져서는 책을 덮어 꽂았다.
애당초 책의 내용이나 장르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터.
아빠의 출신과 학력이 언니의 기대치에는 별로 못 미쳤나 보다.
무례함의 최대치를 맛본 나는
빗자루로 그 언니를 잘 쓸어
쓰레받기에 받아 바로 내다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얼마 전
동네 언니가 흘리듯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 그 언니 있잖아.
요즘 안 보였잖아. 한국 간 지 오래됐대.
남편이랑 이혼인지 별거인지 한 거 같지? 그래.
애들 이제 다 성인 되고 그렇게 되었나 봐.
애들이 엄마 진짜 싫어했대. 찾지도 않는다지."
주제넘게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생각보다 언니의 그런 변화가
전혀 고소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언니의 자랑거리였던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잠시 잠깐 걱정이 되었다.
거실 책장에 먼지를 덮고 있는
아빠 책을 꺼내보았다.
"아빠는 양력란에 왜 그나마 멋진 부분들은 적지도 않은 걸까.
참 순진하신 분이라니까."
그러고 보니 나도 아빠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혼자 남은 늦가을 금요일 밤.
몇십 년 만에 아빠의 글을 정독하기로 한다.
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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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사람은 우리가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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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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