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갈 때는 유독 시차가 심하다.
그래서 한국에 도착하면 일주일 정도 길게는 2주 정도는
아직도 유럽 시간으로 새벽 4시에 저녁을 차려먹고 오후 3시쯤 잠에 드는 시간들을 보낸다.
그게 싫어서 이번에는 비행기 안에서 와인을 잔뜩 마셨다.
“와인 좀 더 마실 수 있을까요. 잠이 안 와서…”
친절한 사람들.
와인병이 늘어만 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
사실 잠이 온다는 말은 이태리 말에서도 들어보지 못 한 표현이다.
잠이 사람도 아닌데 어딘가에서 출발하여
나에게 온다고 생각하다니 잠깐 혼자 웃음이 났다.
어쨌는 잠은 폭설 때문인지 아직도 나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승무원은 참 재미있었다.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기내식을 기다리는데 내 차례가 되자
갑자기 패밀리 레스토랑 식으로 무릎을 꿇고 내 옆으로 오더니
반짝이는 눈빛으로
”마지막 생선이 하나 딱 남았습니다!“
밀고하듯 속삭였다.
그래서 나도
무슨 마지막 추가 분양이라도 당첨된 것 마냥
”오! 이런 행운이! 그럼 그 생선을 제가 먹겠습니다!“
라고 했다.
아무튼 아직도 잠은 오지 않는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아까부터,
집을 나설 때부터 어딘가 모르게 내 머리 한 구석에
수챗구멍의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질문. 뜬금없긴 한데,
사랑이란 뭘까…
난 남편을 아마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망나니 같은 나를 아직도 측은하게 바라보는 우리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사랑일까…
섹스하고 싶은 게 사랑이라는 감정인지,
먹고 싶은 것을 굳이 남겨 혹시라도 식을까 품에 안고 지퍼를 올리는 야무진 손길인지,
집에서 온기를 피우며 기다릴 누군가을 생각하며 빨라지는 발걸음인지,
눈길을 뚫고 집 밖까지 마중나와 기다린 사람에게 화를 내며 느껴지는 죄책감인지,
사실 난 잘 모르겠다.
새하얀 백합 꽃잎에 또로로 맺힌 아침 이슬 같은 아이의 눈동자… 그것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그간 접히고 접힌 미간이 무장해제되는 그런 것이 사랑일까.
사실 난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누구한테는 굳이 사랑한다고 하고
또 누군가한테는 네가 그냥 좋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불분명한 감정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그런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거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
어른이라면 당연히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사람은 kibun에 따라 결정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번에는 부모님 댁에서 몇 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니 약간 퀴퀴하면서도 구수한
익숙한 엄마 아빠 냄새가 났다.
욕실을 여니 익숙한 욕실 냄새가 났다.
피부가 빨개질 정도록 뜨끈하게 샤워를 했다.
식탁에는 내가 좋아하는 신김치만 넣은 김밥과 생고기가 놓여 있었다.
"토란국 먹을래?"
"와, 토란국도 있어? 먹어. 좋아해."
"응. 영미 이모가 어디서 났다고 줬어!"
식사 후 보통 우리 셋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았다.
엄마는 간간히 뜨개질을 하고
아빠는 간간히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았다.
"단감 좋아하지? 엄마 친구가 줬는데 맛있더라. 먹을래?"
"응."
하루하루 엄마는 옷장에서 찹쌀 모나카나 땅콩 사탕을 하나씩 꺼내주던 할머니처럼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을 싸목싸목 꺼내 놓으셨다.
"점심에 굴비 먹을래?"
"응."
"저녁에 오이지 먹을래?"
"응."
하루는 눈이 잔뜩 내린 날 친구와 친구 딸도 만나 눈사람도 만들었다.
그리고 혼자 눈이 내리는 밤길을 걸었다.
노란 가로등에 비친 하얀 눈이 예뻐서 걷고 싶었다.
'눈이 오는 날은 포근하구나...'
어느 날을 오후 늦게 운동을 할 겸 동네에 나갔는데,
사람들이 다 상자 하나씩을 들고 다니는 것이다.
케이크 상자.
핸드폰을 켜 보니 24일이었다.
동네 빵집에 가서 좀 커 보이는 초코 케이크를 하나 샀다.
남편이 생각나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밝은 얼굴로 크리스마스 선물 쇼핑을 하는 모습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놓였다.
집 앞에 거의 다 와서는 살짝 미끄러져 케이크 상자를 놓쳐 바닥에 떨어뜨렸다.
"오다가 케이크 떨어뜨렸어. 엄마, 한번 봐 봐."
"괜찮은데? 그냥 좀 쏠렸어."
말이 없던 아빠가 찌그러진 케이크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근데 케이크는 왜 사 온 거야?"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밖에 나갔더니 다 이거 하나씩 들고 다니더라고요."
"그래? 크리스마스? 다들 케이크를 먹나 보네."
"저녁은 오징어 먹을래?"
이브 저녁으로는 오징어 미나리 초무침을 먹었다.
"이번에 엄마 아빠하고 시간 보내고 하려고 오래 있는데
별로 할 게 없네. 날씨가 추워서 나가지도 못하고."
"난 그냥 따뜻한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게 좋아."
엄마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초무침이 바닥을 보일 때 즘 나는 뜬금없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빠, 저 때문에 마음 많이 상하셨죠.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그게 아빠한테 화를 낸 게 아니라
제 상태가 불안정한 것을 아빠한테 그렇게 했어요.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 주세요."
보잘것없는 겨울 방학 공작 숙제처럼 드디어 이 말을 아빠 앞에서 꺼냈다.
한국에 온 지는 벌써 2주가 지났다.
아빠는 웃지도 화내지도 않으시고 밥그릇에 시선을 고정하고
식사를 이어나가셨다.
예상외의 아빠의 반응에 나는 조금 아니, 몹시 당황했다.
이런 미묘한 잠깐의 정적을 느낀 엄마가 입을 뗐다.
"왜 대답을 안 해?"
"응? 뭐 대답할 게 있나? 음... 난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엄마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여전히 아빠는 시선을 내리고 밥을 드셨다.
"엥? 왜 기억이 안 나?
너도 진짜, 다른 아빠 같았으면 몇 번이고 밥상 뒤집어엎었어."
아빠가 웃으면서 다 괜찮다고 해 줄 줄 알았는데...
아빠의 표정은, 아빠의 주위를 감도는 기운은
조금은 차갑고 잿빛이었고.
우는 것도 화가 난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뭔가 풀 죽은 아이 같았다.
아빠가 놀라지 않아서 나는 놀랐다.
우리는 식사 후 다시 소파에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보았다.
"케이크 드실래요?"
"그래."
약간 찌그러진 케이크에 초 다섯 개를 꽂았다.
노랗게 빛나는 불빛들이 뭔가 우리의 공간을 순간 바꾸었다.
"같이 불어요!"
엄마 아빠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촛불로 다가오셨다.
"소원 빌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후~
단번에 꺼진 촛불에 이상하게 뿌듯함까지 느껴졌다.
'하루하루 싸목싸목 꺼내서 아빠한테 줄거다.'
그리고 오늘 잠이 왔다.
드디어 잠이 왔다.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