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요코와 나

살아있니? 살고 있니?

별책



믿지 않았다.

중년 또는 노년들이 지금이 더 젊어진 기분이라고 하는 말들을.

건강 보조식품 광고에나 나오는 '십년은 젊어진 기분이에요"와 같은 의미없는 자기 최면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요코가 소개해 준 나탄의 아슈탕가 요가 수업을 들은 후,

슈퍼에서 파는 싸구려지만 딱히 흠잡을 데 없는 보노멜리 카모밀라 티백을 찢어 티팟 거름망에 넣으며 나는 어떤 연결고리도 없이 갑자기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20대에도 30대에도 나는 중년 이후의 삶을 걱정하며 언제나 미래에 대해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니까 저녁 식사로 퉁치는 야근을 견디고 포인트와 마일리지를 알뜰히 모으고, 청약 통장을 만들고 펀드에 투자하고 가성비를 따지며 물건을 사고, 직장 선배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고 새벽에 영어 학원을 다니고, 회식 후 노래방에서는 듣기도 싫은 유행가를 무척이나 신나는 척 하면서 부르는 명예 한국인의 삶.

언젠가 다가올 늙음에 추해지지 않기 위해 현재의 풋내나는 젊음 따위는 싹싹 갈아 가루를 내어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내 삶은 마치 즐겨찾기 스크랩 같았다.

즐겨찾기에 이것저것 나중의 내 삶에 유용한 것들을 모으기 바빠 그걸 찬찬히 볼 시간도 없었다. 나중에 꼭 봐야지 하지만 십년이 오십년이 지나도 나는 절대 그 즐겨찾기 사이트를 다시 방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자학의 몸부림들이 어쩌면 현재의 불안하고 부족한 내 삶에 대한 면죄부가 되길 바랬을지도.


- 어쨌든, 나 열심히는 살았다고.



과연 이 썩어 냄새나는 현재가 정말 나중을 위한 밑거름이 되긴 되는걸까?





요코는 이탈리아에서 치과 의사 보조라는 간호사도 아니고 치위생사도 아닌 이탈리아스러운 애매모호한 일을 10년이나 했었다.


아침 7시면 일어나 달려서 버스를 잡아타고 거의 한 시간 정도를 달렸단다.

병원에 도착해서 오후 6시까지 불안에 떠는 수십 명의 손님들을 상대하다보니 이제 그 누구와도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이게 10년 동안 일하면서 건진 유일한 이점이라고 했다.

10년이 지나도 월급은 오르지 않고 무엇보다 자기발전을 느낄 수 없었다.


그 무렵 10년을 동거한 남자친구와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남자친구의 집에서 나와야 할 판국이었다. 그런데도, 더이상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시간을 죽이며 보내기 싫었단다. 물론 치과의사의 새 마누라가 병원까지 드나들면서 진상을 피운 것도 한 몫 했지만.


요코는 돌연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아슈탕가 요가를 시작했다.


다행히 보조금이 나오는 동안 어학원에 파트타임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환자가 아닌, 말하고 싶어 안달난 별별 나라의 사람들과 신나게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았단다.


그리고, 남자친구와는 헤어졌고 혼자 살 월세집을 얻었다.


그런데도 요코는 자기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고한다.

아슈탕가를 하며 한시간 반을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생전에 한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근육들을 하나 둘 깨우며

요코는 날마다 조금씩 발전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노년의 삶이 나오는 "VR"을 착용하고는 사지를 허우적대며 열심히 노인의 삶을 살던 내게

요코는 아슈탕가 요가를 권했다.





카모밀라를 비우고, 나는 동네 아드리아 해변으로 내달렸다.


잡티랑 잔주름 생기면 '나중에' 늙어보일까봐 멀리서 바라만보던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노오란 해를 마주하고 해달처럼 배영으로 바다에 둥둥 몸을 맡겼다.


- 나 살아있네. 아니, 진짜 살고 있네.


먼 발치에 한무리의 멸치떼들이 파다닥 날아올라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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