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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삼사오육칠팔구 Feb 15. 2020

다시 돌아온 이탈리아



남들에게는 설레는 여행이겠지만 나에게는 일상으로의 복귀.



우한 폐렴 때문에 인종 차별을 받지는 않을까,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이곳은 평온했다.


공항에서 간단한 체온 검사가 추가된 것 말고는 달라진 것도 없었다.


남편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고, 짐을 실어 주었다.


집에 도착하니 라디에이터가 언제부터 꺼져 있었는지 냉기가 돌았다.



거실 테이블에 놓인 작은 하트 상자.


'뭐야? 내 거야?'


'너 말고 그럼 누구... 내일 발렌타인데이잖아.'


'아...'



짐을 정리하고 잘까, 그냥 잘까 고민하다 남편이 엉거주춤 어색해 하는 것을 느꼈다.

가족들이 남편 선물의 답례로 보낸 선물들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행 가방을 벌렸다.




'이건 일본 갔을 때 사온거야. 이건 오빠가 보낸 비타민이랑 영양제고, 이것도 한번 먹어봐.'

'이렇게 선물이 많아? 이건 뭐야?'


그렇게 가방을 열고 들어찬 짐들을 보니 그냥 다시 덮고 잘 수가 없었다.


가져온 명란젓과 요코에게 줄 레토르트 김치찌개, 김 등 먹을 것을 냉장고와 주방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어정쩡하게 소파에 앉아 선물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내 잠옷 바지를 소파 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그거 사이즈 라지야. 입어. 오늘 자고 가. 좀 여기서 지내 봐.'

'응? 나 옷장에 옷 있을 걸?'



남편은 책장에서 책을 하나 뽑더니 침대로 갔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짐 정리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안방으로 가니 남편은 침대 구석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이불을 꺼내 덮어주고 전기장판을 켜고 잠을 청했다.




한국에 있을 때 3살 조카에게 책을 하나 선물했다.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은데, '잠이 어떻게 잘 올까' 같은 것이었다.


잠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별에 산다고 한다.


잘 씻고 이불을 꼭 덮고 불을 끄고 좋은 생각을 하며 잠을 부르면


잠은 바로 그때 짐을 싸고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우리에게 온다고 한다.



등을 돌린채 웅크리고 자는 남편에게 굿나잇 뽀뽀를 하고 잘까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냥 스스륵 잠들어 버렸다.



어제 나는 잠을 부르는 의식을 그대로 따랐고, 잠은 나에게 잘 와 줬다.





남편이 일어나는 소리에 잠이 깼다.


남편은 일어나자 마자 샤워를 하려고 옷을 챙겼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일어나자 마자 침대를 튀어나갈 수 있어? 나는 좀 뭉그적 거려야 하는데.'

'이게 뭐라고...'



남편이 샤워하러 들어간 사이 더 잘까 커피를 끓일까 뭉그적 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마시지는 않지만, 아침에 커피 향을 맡는것이 좋아 모카포트에 커피를 끓이고,


빈 여행 가방들을 아래 창고에 옮겼다.


남편은 어제 준 영양제 등을 들고 집을 나서려 현관을 열었다.


어제 가져온 초코파이를 건냈다.


'발렌타인데이라고 준비한 건 아니지만, 이거 받아.'


남편은 미소를 지었다.


우린 서로 뽀뽀를 할까 망설이다가 어색한 뽀뽀를 하고 남편은 출근을 했고 나는 문을 닫았다.




오후에 잠을 좀 자고 일어나


동네 문방구와 복사집, 슈퍼에 갔다.



사람들은 친절했다. 모두 눈을 보고 잘 가라고 인사하고


이번 달에 있을 카니발에 대해 말해 주었다.



젊은 여자 계산원도 내 눈을 보고 발렌타인데이 잘 보내라고 인사했다.

나는 그 인사가 좋기도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그냥 고맙다고 미소만 짓고 너도 잘 보내라는 말도 못하고 나왔다.


8시가 넘어 집에 들어 왔는데, 남편은 그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좋아하는 과일이며 먹을 것을 주방에 정리하고 


아침에 쿠쿠에 해 놓은 밥과 한국에서 가져온 뿌려먹는 멸치와 사온 채소들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익숙한 이탈리아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말을 하고 이탈리아 음악이 흘러 나왔다.


그냥 들어서 80%정도 이해했을까?


주말에 날씨가 좋으면 남편에게 어디에 가자고 할까 잠깐 생각했었다.



주말에는 날씨가 흐릴 것 같다.


라디에이터를 켜고 침대에서 비행기에서 읽다 만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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