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에게는 설레는 여행이겠지만 나에게는 일상으로의 복귀.
우한 폐렴 때문에 인종 차별을 받지는 않을까,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이곳은 평온했다.
공항에서 간단한 체온 검사가 추가된 것 말고는 달라진 것도 없었다.
남편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고, 짐을 실어 주었다.
집에 도착하니 라디에이터가 언제부터 꺼져 있었는지 냉기가 돌았다.
거실 테이블에 놓인 작은 하트 상자.
'뭐야? 내 거야?'
'너 말고 그럼 누구... 내일 발렌타인데이잖아.'
'아...'
짐을 정리하고 잘까, 그냥 잘까 고민하다 남편이 엉거주춤 어색해 하는 것을 느꼈다.
가족들이 남편 선물의 답례로 보낸 선물들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행 가방을 벌렸다.
'이건 일본 갔을 때 사온거야. 이건 오빠가 보낸 비타민이랑 영양제고, 이것도 한번 먹어봐.'
'이렇게 선물이 많아? 이건 뭐야?'
그렇게 가방을 열고 들어찬 짐들을 보니 그냥 다시 덮고 잘 수가 없었다.
가져온 명란젓과 요코에게 줄 레토르트 김치찌개, 김 등 먹을 것을 냉장고와 주방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어정쩡하게 소파에 앉아 선물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내 잠옷 바지를 소파 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그거 사이즈 라지야. 입어. 오늘 자고 가. 좀 여기서 지내 봐.'
'응? 나 옷장에 옷 있을 걸?'
남편은 책장에서 책을 하나 뽑더니 침대로 갔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짐 정리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안방으로 가니 남편은 침대 구석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이불을 꺼내 덮어주고 전기장판을 켜고 잠을 청했다.
한국에 있을 때 3살 조카에게 책을 하나 선물했다.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은데, '잠이 어떻게 잘 올까' 같은 것이었다.
잠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별에 산다고 한다.
잘 씻고 이불을 꼭 덮고 불을 끄고 좋은 생각을 하며 잠을 부르면
잠은 바로 그때 짐을 싸고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우리에게 온다고 한다.
등을 돌린채 웅크리고 자는 남편에게 굿나잇 뽀뽀를 하고 잘까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냥 스스륵 잠들어 버렸다.
어제 나는 잠을 부르는 의식을 그대로 따랐고, 잠은 나에게 잘 와 줬다.
남편이 일어나는 소리에 잠이 깼다.
남편은 일어나자 마자 샤워를 하려고 옷을 챙겼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일어나자 마자 침대를 튀어나갈 수 있어? 나는 좀 뭉그적 거려야 하는데.'
'이게 뭐라고...'
남편이 샤워하러 들어간 사이 더 잘까 커피를 끓일까 뭉그적 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마시지는 않지만, 아침에 커피 향을 맡는것이 좋아 모카포트에 커피를 끓이고,
빈 여행 가방들을 아래 창고에 옮겼다.
남편은 어제 준 영양제 등을 들고 집을 나서려 현관을 열었다.
어제 가져온 초코파이를 건냈다.
'발렌타인데이라고 준비한 건 아니지만, 이거 받아.'
남편은 미소를 지었다.
우린 서로 뽀뽀를 할까 망설이다가 어색한 뽀뽀를 하고 남편은 출근을 했고 나는 문을 닫았다.
오후에 잠을 좀 자고 일어나
동네 문방구와 복사집, 슈퍼에 갔다.
사람들은 친절했다. 모두 눈을 보고 잘 가라고 인사하고
이번 달에 있을 카니발에 대해 말해 주었다.
젊은 여자 계산원도 내 눈을 보고 발렌타인데이 잘 보내라고 인사했다.
나는 그 인사가 좋기도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그냥 고맙다고 미소만 짓고 너도 잘 보내라는 말도 못하고 나왔다.
8시가 넘어 집에 들어 왔는데, 남편은 그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좋아하는 과일이며 먹을 것을 주방에 정리하고
아침에 쿠쿠에 해 놓은 밥과 한국에서 가져온 뿌려먹는 멸치와 사온 채소들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익숙한 이탈리아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말을 하고 이탈리아 음악이 흘러 나왔다.
그냥 들어서 80%정도 이해했을까?
주말에 날씨가 좋으면 남편에게 어디에 가자고 할까 잠깐 생각했었다.
주말에는 날씨가 흐릴 것 같다.
라디에이터를 켜고 침대에서 비행기에서 읽다 만 책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