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극장 7.
퇴근하고 숲으로 갔다. 당시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곳엔 두려움과 눈물을 먹고 몸집을 키운 괴물이 살았다. 괴물은 내가 무력함을 느낄 때마다 점점 수가 많아졌고 군단을 이룰 만큼 힘이 커졌다.
숲에는 어릴 적 읽었던 전 세계 모든 정령이 살았다. 상상의 세계에서 평안하게 살던 이들은 괴물 군단의 위협과 습격을 피해 모두 더 깊은 숲으로 숨어들었다.
괴물들은 내게 가던 길을 멈추라고 외쳤다. 우리는 네가 고꾸라져 쓰러지는 걸 보고 싶다고 했다. 너무 무력한 나머지 나는 그 말처럼 멈추고 싶었다.
그때 곁에 있던 거대한 키의 나무가 몸을 거칠게 흔들어 열매를 떨어뜨렸다. 나무는 열매 두 알을 먹으면 몸이 투명해지고 괴물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절대 멈추면 안 돼. 위협에 반응하고 무릎을 꿇으면 안 돼.
열매 두 알을 먹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되었다. 바람이 되자 신기하게도 아주 먼 곳에서의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좋은 정령들은 숲이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길 염원했다.
쟤가 사회인이 되더니 너무 많은 자극에 반응하고 있어. 너 때문에 우리까지 너무 힘들어. 제발 정신 좀 차리렴. 최우선으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바람이 되어 상상 이상으로 흉측하고 소름 끼치는 괴물 군단을 통과했다. 이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건 무서운 일이었지만 나는 바람이었다.
이들은 우울하고 무력한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외쳤다. 네가 바람이 되었다고 우리를 물리칠 수 있을 것 같니? 설령 우리가 없는 곳으로 도망쳐도 과연 그곳에 널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그냥 여기서 멈춰.
아주 먼 곳에서 희미하게 음악소리가 들렸다. 좋은 정령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정말 실낱처럼 작게 들렸다. 너무 작아서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만큼. 그곳에 음악은 존재할까? 저 너머에 좋은 정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의구심을 감지한 괴물 군단이 너무 좋아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생각처럼 좋은 정령은 허상이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쫓아가지 마.
괴물 군단은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아무리 가도 줄어들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나무가 당부한 말과 좋은 정령들의 이야기를 잊어버렸다. 어쩌면 지금 여기서 포기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굳이 애써서 괴물 군단과 맞설 필요가 있을까.
바람이 괴물 군단을 통과할 때 곁에 있던 나무들도 살랑살랑 몸을 흔들었다. 마치 내 의구심에 대답하는 것 같았다.
의심 좀 그만해 인간아. 아까 들었던 당부를 모두 잊었니? 어서 괴물 군단을 벗어나 그곳에 가서 좋은 정령들을 데려오렴.
나는 속력을 높였다. 언젠가 마주했던 깨끗한 하늘과 신록이 그리웠다. 정령이 들려준 아름다운 미담과 음악이 그리웠다. 바람처럼 괴물 군단을 통과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의 아우성이 점점 옅어지고 거짓말처럼 눈부신 신록이 나타났다. 오랜만의 초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