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이 끓으려면 100도씨가 되어야 하잖아.
그런데 보통 99도씨에서 아 너무 힘들다, 그러고 멈춰.
그러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야. 그 고비를 넘겨야 라면이 맛있게 되는 거라고.
다니는 회사의 회장님이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냐'는 직원의 질문에 한 대답이었다.
99도씨와 100도씨. 단 1도 차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한 끗이라고.
처음 주 5일 운동을 시작했을 때 가장 힘든 날은 매주 금요일이었다. 매일 새벽마다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을 수련하다 보니 금요일이 되면 체력이 바닥이 났다. 누가 밤새 내 몸을 때렸나 싶은 정도로 온몸이 통증으로 가득한 날이 금요일마다 반복됐다.
매트 위에선 우는 날도 많았다. 몸이 힘드니 생각도 부정적인 것들만 올라왔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까지. 이런저런 망상과 억울함이 땀과 눈물에 뒤엉켜 매트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그런데 금요일은 참 신기한 요일이다. 마음은 울고 있는데, 그동안 안되던 동작이 이상하게 금요일에는 마법처럼 성공했다. 분명 체력이 딸려 평소보다 수련을 대충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도는 금요일만 되면 쭉쭉 앞으로 나갔다.
3개월이 넘게 이 패턴이 반복되었다. 이게 갑자기 왜 되지? 수련이 끝나면 무언가 나를 속인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울면서 시작했는데 가장 개운하게 끝나는 날. 그렇게 금요일만 되면 요가원을 떠나는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나자 매트 위에서 우는 날이 마법처럼 줄어들었고, 금요일의 고통도 어느새 사라졌다. 그제야 알았다. 아, 이게 100 도구나. 이게 물을 끓이는 방법이구나.
“신기하네… 금요일에 그렇게 요가가 잘되면 성취감 때문에 금요일이 더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
“네 아니더라고요. 성취감이 있어도 힘든 건 힘든 거던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금요일이 싫었다. 100도씨의 성취감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99도씨에서 맴도는 평화로운 날들이 더 좋다.
하지만 그 금요일의 성장 때문에 나는 요가를 멈출 수가 없었다. 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안될 것 같았던 아사나가 한순간에 폭발하는 것을 본 이상,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월화수목금. 주 5일 운동은 매일 한계에 마주치는 날들과 그 한계를 넘어서는 날들로 가득했다. 단조로움과 강렬함 사이에서 변주하는 그 모든 요일은 매일매일 성장이라는 황금 선율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아쉬탕가 요가가 주는 고통 어린 선물에 중독이 되고 말았다.
뭐든지 힘을 빼고 해야 잘 되거든요. 근데 사람 마음이 처음부터 힘을 빼기가 참 어려워. 잘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힘을 빼려면 극한까지 가봐야 돼요. 그래야 힘을 빼는 법도 배울 수 있어요.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많은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한 말이 있다. 바로 '힘을 빼고 해야' 뭐든지 잘된다는 것. 그런데, 그 경지까지 가기 위해선 자기 욕심을 채울 때까지 해봐야 한다는 것.
사실 금요일마다 안되던 동작이 왜 갑자기 되었는지 알고 있다. 바로 마음을 비웠기 때문이다. 온몸에 힘을 빼고, 동작이 되든지 말든지 그냥 요가원에 갔다는 것에 만족했던 금요일. 내 욕심이 아니라 오로지 그 순간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아사나를 만날 수 있었던 이상한 요일.
하지만 금요일의 마법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달려보았던 이전의 날들이 있기 때문이다. 힘을 주는 법을 모른채 힘을 빼는 것은 그저 '힘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평온함은 어떠할까. 거친 파도 속에서 살던 이가 잔잔한 해안가와 만났을 때. 그가 느낄 안도감은 얼마나 완전할까. 어쩌면 파랑새에 불과할지도 모를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오늘도 매트 앞에 서 평화를 외친다. 옴 - 샨티 샨티 샨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