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전 날 실내화를 빨았다
태평함인가 나태함인가
"엄마, 이제 책가방 싸야 하지 않아?"
"으응? 그렇지. 내일 싸자. 첫날은 종합장 하고 필통 하고 물통만 가져가도 될 거야. 아니다, 재량활동할 수도 있으니까 색연필이랑 사인펜까지 가져가자. 근데 첫날 시간표가 뭐지?교과서 가져가야하나?"
아휴 벌써 내일이 개학이다. 큰애는 시업식, 둘째는 입학식인데, 가방만 새 걸로 사두고 여태 비닐포장도 안 풀었다니. 나도 나지만 애도 가방에 큰 애착이 없나 보다.
유치원 졸업선물로 물품들을 알뜰하게 준비해 주셔서 초등 입학 준비물은 따로 안 사도 될 정도니 너무 감사하다. 이제 여기에다 이름만 쓰면 끝나는데, 입학 준비라고 따로 할 게 뭐가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모든 일들을 미루고 있다.
작년에 둘째 유치원에서 6살 마치는 선물로 크레파스랑 사인펜을 주신 게 있는데 그걸 몰래 숨겨두길 잘했다. 애들이 보면 벌써 찔끔 사용하고 어딘가로 제 짝 잃고 돌아다녔을 텐데 말이다. 그건 큰아이에게 선물인 듯 선심 쓰면 되니, 다 준비완료되었다.
아이들에게 새 학기를 맞이한다는 것은 어떤 심정일까. 우리 집 아이들을 보면 그냥 주말 지나고 학교 가는 느낌으로 아. 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내가 어릴 때는 3월 1일은 하루종일 심장이 쿵쾅거려서 기분도 좋지 않았는데 말이다. 학교 자체도 가기 싫었지만 새로운 변화는 나에게 설렘보다는, 바닥까지 가라앉는 기분으로 먼저 다가오곤 했다.
작년에는 휴직을 한다는 기쁨으로 아이가 새 학교에 적응하는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올해는 연속된 휴직이라 그런지, 아직도 일 년의 시간이 남았는데도 나는 "이번 휴직이 마지막이네." 하며 마치 월요병 걸린 환자처럼 '라스트 휴직병'에 걸렸다.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이유는 두 달 동안 아이들과 지지고 볶느라 내 기력을 다 소진했기 때문일까, 그냥 게으름에 가속력이 붙어서 계속 게으르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내일이면 학교에 가는 두 아이들의 물건을 챙기다가, 아뿔싸, 실내화주머니가 현관 구석에 그대로 처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빨자, 나중에 빨자, 하고 나의 무의식이 그것들을 밀어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더 이상은 물러날 시간이 없기에, 어젯밤에 수세미와 빨랫비누로 그것들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요즘 실내화는 우리 어렸을 때 천으로 된 실내화가 아니고 eva실내화라서 한두 시간이면 마른다. 어릴 때 실내화를 빨 때면 빼도 빼도 안 빠지는 비눗물을 그대로 두었다가 노란 선자국이 생기면서 누렇게 말라버린 실내화를 신고 다녔는데, 요즘 실내화는 냄새도 안 나고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들 실내화를 닦았다.
큰 아이 것은 금세 마를 텐데, 둘째 아이 것은 유치원에서 신던 털이 달린 실내화밖에 없다. 저 털은 과연 오늘 중으로 마를 것인가. 어젯밤에 빨아놓았지만 새벽에 보니 아직도 축축하다. 저녁까지 기다려보고 안 마르면 드라이기로 말려볼 생각이다. 미루고 미루던 일의 대가는 결국 이렇게 치르게 된다.
엄마가 분주하게 실내화를 빨고 색연필과 사인펜을 꺼내면서 왔다 갔다 하는 걸 본 큰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질렸다. "야호, 학교 간다."
"일호야, 학교 가는 게 좋아?"
"좋아. 친구들하고 놀 수 있잖아. 늦잠 못 자는 건 싫은데 그래도 학교 가는 게 좋아."
학교 가는 게 좋아서 정말 다행이다.
"이호야, 너는 1학년 1반이래. 입학식 때 꽃은 유치원 졸업식 때 썼던 비누꽃 한 번 더 재활용해도 될까? 꽃이 비싸네."
"응. 돈은 아껴야 하니까. 나는 그 파란색 비누꽃도 괜찮아."
아싸, 꽃 값 굳었다. 이렇게 닥쳐서 해도 다 그럭저럭 하게 마련이고, 미리부터 분주하게 준비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사인펜과 색연필에 네임스티커를 붙이고 필통에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은 아이들과 같이 해야겠다. 함께 책가방을 챙기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마음가짐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번쩍번쩍 불빛이 나오는 빨간 책가방을 매고 등교할 둘째 아이에게도 반짝이는 순간들이 가득하기를 바랄 뿐, 엄마의 나태한 모습은 본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게으름을 피울 수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절대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매번 정신 똑바로 챙기고 살지 않아도 괜찮다.
매년 3월 2일이면 긴장된 마음으로 교실에서 아이들을 맞는다. 그날만큼은 대부분의 아이들의 얼굴표정은 굳어있다. 웃고 떠드는 친구들도 거의 없고, 첫날부터 오버하는 친구도 사실은 긴장해서 그렇다. 모두의 가슴속에 긴장감이 가득 차오른 3월 2일의 풍경들이 왠지 그리우면서도 안 그립다.
그렇게 그리우면서도 그립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덕분에 나도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