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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Apr 10. 2023

명랑한 년이 되고 싶다

더 글로리 드라마 속 현남의 대사 중에 가장 인상적인 건 명랑한 년이라는 부분이었다.

"전 명랑한 년이에요. 명랑하지만 명랑할 기회가 없다가 숨이 쉬어져서 자꾸만 웃게 돼요."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살면서 이런 걸 해본 적이 없다.

여중생 때는 꽃에 관심이 없었고, 샛별을 보며 스쿨버스를 타고 나가 저녁달을 보며 들어오던 고등학생 때는 꽃보다 중요한 게 많았기에 떨어지는 꽃잎을 받아보려고 한 적이 없던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 짝사랑 남자애를 향한 일념으로 봉숭아물을 들여서 첫눈이 올 때까지 안 빠지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먹는 게 다 손톱으로 가냐"라고 말하던 엄마 말처럼 나는 손발톱이 무척 빨리 자라 버렸기에 그것조차 실패했었다.

미신이나 점 따위도 대체로 믿지 않는 편이라서 메마른 감정을 가진 듯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편인데, 무척이나 문학소녀였던 시절을 생각하면 문과기질이 다분한 것 같으면서도 언어영역은 점수가 좋지 않았고,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이었다. 그런 나는 어느 한쪽으로 특출 나게 잘하는 게 없고 뭐든 어중간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열심히 빠져보는 덕질 같은 것에도 조금 무관했다. 무엇인가에 간절히 소원을 빌어 본 적도 별로 없었다. 딱 한 번 하느님께 온 마음을 다해 빌어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소원 같은 건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낸다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사는 편이다.


제대로 된 벚꽃놀이도 가 본 기억이 없다. 나 잡아봐라, 하며 눈꼴신 연애를 해본 적도 없었고, 지금 남편은 여름에 만나 그해 겨울에 결혼을 했는데, 봄에는 임신 중이라 안정을 취하느라 벚꽃을 잡으려고 뛰어다니기에는 무리였을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명랑한 것과는 거리가 멀게, 인생 참 더럽게 재미없이도 살아왔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돌아오는 봄날은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의 마음이랄까. 무척이나 홀가분하고 해방감이 느껴진다. 집에 가면 청소와 설거지가 기다리지만 아이들이 옆에 없는 시간은 만세를 부르고 싶을 지경이다.

특히 지난 주말은 남편이 오지 않아 우리 셋이 지지고 볶느라 꽤나 지쳐버렸다. 물론 남편이 안 오면 그 나름대로 편하기도 한데, 뭔가 나 혼자 애들과 같이 있는 시간은 에너지가 몹시도 빠져나가버린다.


그래서 오늘 아침 등교시키고 돌아오는 길은 지난 며칠간 벚꽃감상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나의 심리를 보상하듯 꽃눈을 제대로 쏟아내주고 있었다.


햇볕도 따사로운데 짹짹거리는 새소리도 들리고, 갑자기 세상 행복을 다 쥔 사람처럼 기분이 달떴다.

한순간 부는 봄바람은 이제 솜털처럼 부드러워져서 내 마음까지 간질인다. 우수수 쏟아지는 벚꽃 잎 앞에서 갑자기 그 말이 생각이 났다.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날아가는 벚꽃 잎을 잡으려고 덩치도 커다란 아줌마가 팔짝팔짝 뛰는 걸 누가 봤다면 꼴사나웠겠지만 단 두 번 시도만에 잡았다, 꽃잎.

뭐야 꽃잎 잡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어?

약간 허무했지만 속으로는 재빨리 소원을 여섯 개쯤 빌고 꽃잎을 후 불어 날려버렸다.


소원이 여섯 개씩이나 되는 게 웃기지만 매일 아침 확언노트에 적는 그 문장들이라 이제는 툭 쳐도 툭 나온다.


그중에 절반은 아이들에 관련된 건데, 이렇게 애들이 학교에 가버리고 내 옆에 없어서 신난 마음으로, 애들과 사이 좋은 엄마가 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비는 나는 굉장히 모순적이다.


책을 좋아하지만 언어영역 점수는 잘 안 나오는 인생 자체가 모순덩어리 아닌가.

아이들이 옆에 없을 때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지고, 남편이 옆에 없으면 좋다가도 그의 부재에 힘이 쭉 빠져버리는.

소원 같은 건 이루어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매일 아침 확언 노트를 쓰는 나는 역설을 사랑하는 만큼 역설적이다.

여고생 때보다 더 명랑한 년이 되어서 아이들하고 잠시 안녕하니 더욱 명랑해질 거면 뭐 하러 애를 낳았냐고,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며, 벚꽃은 떨어질 때가 더 아름답다는 역설적인 현실마저 아름답게 느껴지는 오늘은 이상하게 명랑하다.


매 맞는데 명랑한 현남처럼, 우울하고 사는 게 힘이 들면서도 순간순간 만큼은 소원을 말해도 괜찮을 것만 같은 오늘은 나도 명랑한 년이다. 벌써 소원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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