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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Jan 15. 2023

집에 있는 거 먹자

본격 마켓컬리 찬양

-오늘 저녁에 뭐 먹지?

-그냥 집에 있는 거 먹자.

-집에 뭐 없는데.

-장모님이 주신 사골이랑 먹지 뭐.


내심 맛있는 거 시켜 먹자는 말을 기대했다가 기분만 상했다.

사골은 저번에 다 먹었다. 한 번 먹을 것만 가져와서 먹고 찌끄레기 남은 건 떡국 끓일 때 넣었는데, 한숨이 나온다.


손이 작은 우리 남편은 반찬에 있어서도 그렇다. 한 번 먹은 반찬은 다음 끼니때 먹지를 않는다. 멸치볶음이나 나물 종류는 아이들의 몫이긴 하지만 그래도 선심 쓰듯 남편 먹으라고 꺼내놓은 밑반찬들은 거의 손도 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국이나 찌개도 마찬가지다. 한 끼만 먹는다.

심지어 치킨도 남아서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건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양념치킨을 냉장고에 넣어뒀다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그러나 남편은 그 맛을 모른다.




그는 건설회사에 다닌다. 남편 덕분에 '함바집'이라는 말을 알았다. 건설현장의 임시 가건물에서 인부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다. 시어머니 말로는 함바집 음식이 간도 세고 조미료도 왕창 들어가서 몸에 좋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 간이 센 음식을 먹으니 점점 입맛이 건강식에서 멀어진다.

함바집 음식에 익숙한 남편은 내가 해주는 음식이 맛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고맙게도 지금까지 반찬투정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은 없다. 단지 표정과 행동에서 나올 뿐이다.

바깥음식에 질린 사람이니, 집밥이 그립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매번 끼니를 집에 있는 거 "대충" 먹자고 하면 나는 어쩌나. 냉장고에서 말만 하면 음식이 뚝딱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결혼하고 몇 년 동안은 남편에게 최대한 집밥을 먹이기 위해 그가 좋아할 만한 닭볶음탕, 오징어볶음, 김치전, 닭갈비 등을 해주곤 했다. 그렇게 그가 주로 잘 먹는 음식들을 생각해내다 보니 공통점이 바로 짜고 매운 음식들이라는 점이다. 짜고 매운 음식을 안 짜고 안 맵게 하면 생기는 일은, 맛이 없다는 거다.

그렇게 돌쟁이를 키우며 남편에게도 돌쟁이처럼 밍밍한 닭볶음탕을 만들어주니 그는 내 집밥을 좋아하지 않은 듯 보였고, 열심히 해준 음식을 남기기 일쑤였다.


어느 날 엄마가 강황을 음식에 넣어 먹으면 몸에 좋다며 한 봉지 주셨다. 마침 시어머니께서 닭볶음탕을 하실 때 카레가루를 넣으시는 게 생각나서 강황가루 한 숟가락 넣어보았다. 

이럴 수가. 노란색 닭볶음탕이 완성되었다. 내가 봐도 맛이 없어 보였지만 더 이상 복구할 의욕이 없던 돌쟁이 엄마는 남편에게 상을 차려주고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갔다.

아이들이 잠들고서야 겨우 나와서 정리를 하던 고단하던 시절이었기에,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에 어슬렁 거실로 나왔다. 남편이 대충 치워 둔 닭볶음탕은 거의 그대로였다. 속상하고 부끄럽고 화가 치밀었다.

설거지조차 해놓지 않던 남편의 모습에 참다 참다 터져버린 날.

그렇게 새벽 두 시에 아이들이 깰 세라 소리 없이 설거지를 하며 소리 없는 눈물을 훔치고 결심했다. 

-잘해주지 말자.


그 후로는 남편의 밥상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해줘도 초보 주부의 밥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주 4회 이상 회식을 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저녁 밥상을 차리는 것이 다른 주부들보다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불어 남편이 육아에 전혀 참여를 하지 않고, 아이 둘 다 가정보육을 하던 그 시절에는 남편의 밥상까지 신경 쓰기에는 여력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주말부부이다. 부럽다면 당신은 육아를 하지 않는 쪽일 것이다. 육아를 하는 쪽의 주말부부 당사자는 핵불맛, 육아를 안 하는 쪽 주말부부 당사자는 개꿀맛인 것이 바로 주말부부다.

지금도 여전히 그는 설거지를 하지도, 청소기를 밀지도 않는다. 

그래도 그의 근무 환경이 여느 회사원들처럼 쾌적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컸기에, 일주일에 한두 번 먹는 집밥을 조금은 더 신경 쓸 마음과 육체적인 여유가 생겼다.


남편을 위한 집밥을 키운 건 8할이 마켓컬리다.

마켓컬리 3년 차인 중급의 주말부부 주부는 아이들과 지내는 동안 열심히 냉장고를 파먹다가 남편이 오는 금요일 오후에 마켓컬리의 어플을 연다. 

이번 주에는 일주일 동안 아이들 먹일 음식과 함께 남편을 위한 샤브샤브 거리를 사본다.

심지어 육수도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마켓컬리 만세.


이제 남편이 "집에 있는 거 먹자."해도 냉장고에서 불쑥 나오는 '집에 있는 거'는 나의 큰 계획임을 숨기고 무심한 듯 한 끼 요리로 탈바꿈 한다.

몸에 좋기만 한 밍밍한 간의 음식을 나는 포기했다. 몸에 좋으면 뭐 하나. 눈물의 노란색 닭볶음탕처럼 버려질 바에는 조금 짭짤하고 맛있는 게 중요하다.

아직 미원까지는 구매하지 않았지만, 라면을 끓이고 스프 하나씩은 남겨둔다. 


"오늘 된장찌개 산 거야? 만든 거야? 맛있네."

묻는 그에게 "내가 한 거지." 웃으며 대답하지만 라면 스프 한 스푼이 들어갔다는 것은 비밀이다.

잘 먹어 주는 육체 노동자를 위해 매주 마켓컬리 앱을 열고 마켓컬리 추천 목록이 담긴 블로그를 훓는 나는, 이 정도면 최고의 아내 아닌가.



#이 글은 시어머니가 싫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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