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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Jan 17. 2023

마음은 선을 타고

 무선 이어폰보다 줄이 있는 이어폰이 좋다.

 블루투스로 연결을 해야 한다는 것은 연결이 안 되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뜻이다. 이미 집에 너무 많은 충전기 선들이 즐비하기에 이것마저 충전을 해야 하는 게 싫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충전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지하철에서 한 시간 동안 오디오북을 듣고 싶었는데 갑자기 꺼지는 경우 그 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난감했던 경험이 블루투스 이어폰 유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값싼 이어폰이 아닌 에어팟이나 갤럭시 버즈를 사라고 하는 거겠지만, 이어폰에 십만 원 이상을 투자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아직 어려운 일이라서 더 그렇다.


 줄이 없는 이어폰이라니, 처음 그 세계를 맞닥뜨리고는 검색에 검색을 거쳐 3만 원대 저렴한 이어폰을 장만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실패였다. 충전시간이 길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끔은 충전이 되어 있지 않았고, 종래에는 왼쪽이 아예 안 켜지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은 한 달 안에 일어났다.

 이어폰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냥 꼽기만 하면 음악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연결 후 켜지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 또 안 켜질까 봐 조마조마한 이런 시간들이 나와는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에 나는 독서실에서 새벽 1시까지 공부할 때가 많았는데, 그날도 아무도 없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머릿속을 졸음으로 가득 채우고 터덜터덜 어두운 골목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잠이 달아났고, 나는 상상 속에서 벌써 범죄피해자가 되어 사건현장에 누워있었다.

 돌아보니 남자 혼자였는데, 중얼중얼 혼잣말하는 모습에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눈만 크게 뜨고 그를 경계했다. 그 남자는 나를 힐끔 보더니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귀에 작은 기계를 대고 있었고, 곧 핸드폰이라는 것을 알았다. 때는 20세기말이었다. 주변에 핸드폰이 있던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고, 대부분 삐삐를 가지고 다니던 때였기에, 혼잣말 하며 걸어가는 남성이 통화 중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일화지만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느꼈을 20세기 여고생의 공포는 어마어마했다. 새로운 것은 편리하지만 오해를 불러일이키기도 한다. 특히 사람사이에 불필요한 거리감을 만든다. 나에게는 무선 이어폰이 그런 것이었다.


 근무할 때 있었던 일이다. C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녀의 교실에 찾아간 적이 있다. 노크를 해도 들어오라는 대답이 없어서 앞문을 빼꼼 열어보니 컴퓨터를 보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나는 일에 방해가 될까 봐 앞문을 활짝 열지 않고 고개만 내민 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쌤 바빠요?"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조차 않아서 몹시 당황했다.

 소심한 나는 그녀에게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보다, 생각하고 문을 조심히 닫고 돌아왔다. 나중에 보니 그녀에게는 에어팟이 있었고, 복도에서 마주칠 때도 그걸 끼고 있을 때가 많았다는 걸 알았다.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그때 내 말을 일부러 무시한 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함께 밀려왔다.

 

 소파에 누운 건지 앉은 건지 모를 자세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그에게 설거지를 하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고 있었다. 원래 리액션이 없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내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겠는 그의 태도에 화가 버럭 나서 큰 소리를 질렀다. "내 말 듣고 있어?" 그는 왼쪽 귀에서 갤럭시 버즈를 빼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한테 뭐라고 했어?"라고 했다.


선이 없는 것은 오해를 부르고, 이유 없는 분노를 유발한다.  




 지하철 맞은편의 연인이 서로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핸드폰 영상을 보고 있다. 기껏 해봐야 이십 대 초반일 것 같은 어린 연인들인데, 아직도 나처럼 선이 있는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다.

 서로의 왼쪽과 오른쪽 귀에 하나씩 꼽은 이어폰은 선을 따라 서로에게 연결돼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학생은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그걸 여학생의 오른쪽 무릎 가까이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여학생의 오른손을 잡고 있다. 손을 잡는다는 건 연결되고 싶다는 걸 말한다.


 줄이 엉키면 풀어야 한다. 풀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가끔 가방 안에서 엉켜버린 이어폰 줄 때문에 풀기 위해 사투를 버리는 일들이 있다. 그럴 때면 "역시 무선이 좋아. 무선 이어폰을 사야 해."라는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지만, 다 풀고 나면 여전히 선이 있는 게 좋다.

 충전을 언제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언제 꺼질지 모르는 이어폰보다는 꽂으면 언제든 음악이 나오는 이어폰이 좋다. 결국은 옆에 있는 사람과 손을 잡고 싶고 귀를 맞대고 싶은 내 마음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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