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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Jan 14. 2023

어머님이 뱉은 마음의 소리

시어머니의 격양된 목소리가 남편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나는? 내가 스트레스받는 건 생각 안 하냐?


십 년 정도 지나니 느끼는 바지만 시어머니는 모두에게 친절하시고 타인의 편의를 잘 봐주신다. 특히 며느리인 나에게 "너희 편할 데로 해. 엄마는 괜찮아."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그런데 자식들에게는 그 이면에 쌓인 분노를 종종 털어놓으시는 편이다.

주로 딸인 시누이와 매일 통화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신다. 둘째 낳기 전에 두 달 정도 시가에서 지냈는데, 당시 같이 살면서 매일 딸과 통화하시는 걸 목격하고 문화충격을 받았다. 나는 우리 엄마랑 한 달에 한 번 할 때도 많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딸과는 며느리 욕도 많이 하실 거라고 짐작은 하나, 대놓고 하시지는 않으니까 나름 괜찮은 고부관계다.


그런 어머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명절에는 너희들끼리 여행 다녀. 우리는 제사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너희 시간 가져. 

이번 명절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그 말씀을 잊지 않고 하셨다.

-올해 추석에는 미리미리 비행기표 알아봐서 여행가. 해외 가려면 미리 준비해야 하니까 지금부터 알아보고 추석 때는 여행 가라.

그런데 나는 이런 말씀이 불편하다. 여행 가는 건 내 자유의지이고, 누가 가라고 허락을 해줘야 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명절에 여행을 가면, 우리 집에는 가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약간의 반항기가 있는 나는 기분이 살짝 묘하다. 게다가 애들 데리고 해외에 나가기가 싫다. 해외까지 가서 노동을 하고 싶지는 않고, 애들 때문에 결국 리조트에서 지내야 하는데, 그럴 바에는 국내로 가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해외는 애들이 더 크고 갈지 말지 생각할 거다. 

"우리 엄마 아빠가 기다리고 계신데, 어딜 가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나의 마음의 소리이다. 우리 부모님은 명절에 우리끼리 여행 간다고 하면 무척 싫어하실 분들이기 때문에 여행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누이에게 화가 나셨다.

시누이네는 강릉에 사는데 이번 설날에 시누이의 시부모님께서 강릉으로 가셔서 관광도 한다고 하셨단다. 그래서 키우는 강아지를 같은 동네에 사는 우리 시어머니께 맡긴다고 했다. 사실 사돈댁 강아지를 몇 번 맡아주신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시누이가 "우리 엄마에게 맡기자"라고 해서 그렇게 통보를 했다.

-아니, 지네들은 강릉 구경 가면서 편하게 돌아다니는데, 나한테 개새끼를 맡기고 지들만 편하자는 거야? 개호텔에 맡기랬더니 개새끼가 스트레스받아서 안된대. 그럼 나는? 나는 스트레스 안 받아? 개 오면 아무 데나 오줌 싸고 짖어대고 순한 애도 아닌데 나한테 개나 보고 지들은 놀고먹겠다는 거냐고.

어머님이 사돈에게 '지네들'이라고 하는 걸 처음 들어서 살짝 놀랬다. 그리고 아이들이 들을까 봐 남편을 얼른 방으로 들여보냈다. 일반 통화였는데 스피커 폰인 줄 알 정도로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어머님의 마음의 소리겠지.

어머님은 혹시 명절에 강릉에서 지낸다면 딸이 집에 오지 않게 되는 상황이 싫었던 게 아닐까, 나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는데, 그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엄마가 우리 보고도 맨날 여행 가라고 하는데, 막상 가면 이렇게 싫어하는 거 아냐?"

"아마 그럴지도. 사돈댁에서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고, 며느리를 친정에 안 보낸다는 거잖아. 명절인데."


아마 이제 어머님은 우리에게 명절에 여행가라는 말을 하지 않으실 것 같다.

"우리 엄마도 늙나 보네. 별 것도 아닌데 화를 내고."

남편은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느낀 지 몇 년 됐어. 남편아. 

어머님은 명절에 딸이 안 오는 게 싫다고 하셨어.


그나저나 명절 싫어. 이건 내 마음의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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