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레미파솔-솔-솔 정도 되는 톤으로 네 여기 있습니다, 하며 두 손으로 물티슈를 건네드린다.
그녀는 물티슈 캡을 열고 한 장, 두장, 세 장을 폭폭폭 뽑더니 뚜껑도 닫지 않고 나에게 다시 돌려준다. 그리고 자기 아이 발에 뭍은 흙을 닦는데 여념이 없다.
고맙습니다, 는요?
고맙습니다를 맡겨놓은 사람처럼 그녀와 물티슈를 번갈아 보다가 겸연쩍게 눈을 돌린다.
아, 나 지금 뭐 한 거지.
5년 전 체육대회 날 학교 운동장에서였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스탠드에 앉아있었으며, 내게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티슈, 밴드, 여분의 물 등이 있었다.
갑자기 우리 반 학부모인 듯 아닌 듯 한 분이 다가오셨고 나에게 물티슈를 빌려서 우리 반 아이 한 명의 발에 뭍은 먼지를 닦아 주셨다. 엄마임이 확실했다.
'저기요. 저 담임인데, 우리 초면이지만 인사는 할 수 있지 않나요?'
라고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녀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아이에게만 밝게 웃어주시고 돗자리로 걸어가셨다. 인사타이밍을 놓친 나는 굉장히 혼자서 어색해했다.
그럼 또 나는 나를 자책한다.
-내가 뭐 잘못했나? 내가 마음에 안 드셨나? 화나셨나?
나는 언제나 을이고 그녀들은 언제나 갑이다.
얼마 전 예쁜 송혜교 언니와 멋진 김은숙 작가님의 콜라보인 드라마 "더 글로리"가 공개되었다. 혜교언니도 혜교언니지만 은숙언니 네이밍은 당연히 따라가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거 보다 보니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학교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초등교사"가 되어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다. 그래서 교대를 가다니. 나는 혜교언니가 교대에 입학하는 그 쓸쓸한 장면에서 어허허허 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감히 교사나부랭이가 위대한 학부모님께 복수를 하다니,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이거 이거 은숙언니 감 떨어지셨네. 큰일 났네 어쩜 좋아.
하지만 그녀의 필력은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 일단 계속 본다.
홀린 듯 보다 보니 드디어 교실문을 대차게 여는 박연진 학부모님 등장. 드르륵쾅.
와우, 교실 문을 저렇게 열어젖히는 학부모라니 역시 현실적이야.
그리고 드디어 내가 궁금했던 대사가 나왔다.
"네 딸 전학? 내 전근? 꿈도 꾸지 마."
아하, 혜교언니는 큰 그림이 있었지. 이사장이라는 줄이 있었고, 전학 가면 또 뭔가 다른 복수를 할 테니 일단 그대로 있으라는 경고. 크아 역시 멋지면 다 언니.(나 솔직히 혜교보다 나이 많음)
아무튼 드라마는 재미있다.
"교육서비스"라는 말의 숨은 뜻에는 일정 정도 동의한다. 그런데, 진짜 서비스업 정신을 가지고 "손님은 왕"을 모토로 생활해야 하는 걸까,라는 것에는 회의가 든다.
물론 친절하면 좋지. 서비스가 친절만을 뜻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또 나는 사전 중독자답게, 서비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생산된 재화를 운반ㆍ배급하거나 생산ㆍ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함"이건 좀 아닌 것 같고.
"개인적으로 남을 위하여 돕거나 시중을 듦" 개인적으로는 아닌데, 게다가 시중을 들어? 이거 애매모호하네.
"장사에서, 값을 깎아 주거나 덤을 붙여 줌" 장사는 아니니까 이것도 제외.
IT용어로써의 서비스는 "고객이나 이용자의 편익을 위한 노력"을 말한다고 한다.
이것저것 붙여서 생각해보면 결국 교육서비스는 학생의 편익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돕거나 시중을 든다는 뜻인가.
학생의 편익을 위해 "돕는" 건 맞다. 그런데 도움을 주는 게 목적이 아니고 "편익"이라는 단어에 초점이 맞춰지면 문제가 생긴다.
원래 교육이라는 것이 말에게 물을 먹여주는 게 아니고 말을 물가로 데려가는 데에 궁극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편하게 물만 먹여주면 그건 교육이 아니다.
또, 시중을 든다는 건 뭘 하라는 거지? 저학년 아이들에게 잡다한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아직 미숙하니까. 하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그 미숙함이 드러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해보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고 실수해도 괜찮고, 틀려도 괜찮지만 다시 일어나 보자, 를 배우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와는 다르게 실수와 실패가 오히려 격려가 되는 유일한 곳이다.
그곳에서 내 아이가 절대로 다른 아이들에게 뒤처지면 안 되고, 다른 아이에게 또는 교사에게 기분 나쁜 소리 하나도 들어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틀렸다는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온 교실이 모든 아이를 함께 키우는 곳이라는 나의 생각을 철저히 무시하고 가끔 "내 아이만 손해 보고 있으니, 저 친구를 떼어놓아 달라, 내 아이가 피해를 보았다. 쟤네들은 가정교육도 안 받은 막돼먹은 애들이냐?" 등등으로 자녀의 친구들을 욕하는 부모들이 있다.
어느 날 우리 반에서 학폭이 일어났을 때 "같은 반 친구"아니고 "같은 반 학생"으로 문구를 고쳐달라는 아버지를 만났다. "걔는 친구 아니잖아요? 친구 아니니까 친구라고 하지 마시고, 선생님도 친구라고 부르지 마세요."라며 나를 못 배운 사람 취급했던 그 아버지. 참고로 그 아버지는 학교폭력 가해자로 신고를 받은 학생의 아버지였다. 친구가 아니니까 욕을 해도 괜찮았다는 걸까. 그 의미는 아직까지도 오리무중이다. 그냥 나한테 화풀이를 했다는 게 내 결론이지만.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친구가 아니라고 아홉 살 아이에게 가르치는 아버지. 아이가 커서 그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니잖아요? 나를 낳아줬다고 다 아버지는 아닌 거예요. 알아들으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시길.
그리고 드라마에서 줄곧 나오지만, 콩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건 진리다. 예쁜 아이가 계속 예쁘게 자라려면 부모가 곧게 살아야 한다.
조금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양보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 같이 성장하는 곳이 교실이다.
학부모와 학교가 갑과 을의 관계가 더 이상 아니었으면 한다. 함께 아이를 키우는 곳이다. 아이에게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는 부모가 결국 예의 바른 아이를 키울 자격이 된다.
그나저나 더 글로리에서 혜교 언니가 결국은 예솔이는 안 건드릴 거라는 걸 안다. 교사는 그런 존재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 교사가 되었더라도, 내 교실에 있는 1년은 자식 같고 막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