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책장 Feb 22. 2023

오렌지 자몽 블랙티 같은 사람

처음 오렌지 자몽 블랙티를 마셨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오렌지도 안 좋아하고 자몽은 왜 먹는지 모르겠으며, 블랙티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가운 일요일 아침, 캠핑장에서 마실 것이 없던 나는 남편에게 차를 한 봉지만 얻어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와 달리 외향적인 남편은 옆 텐트에서 이 오렌지 자몽 블랙티를 2 봉지 들고 왔다. 친절하게도 1 봉지가 아닌 2 봉지를 주셨단다.


"아이고 내가 안좋아하는 차잖아. 그냥 녹차나 보리차였으면 좋을 텐데."

나름 좋은 차를 주셨을 텐데 또 뭐가 불만인지 주신 분의 성의를 무시하는 말을 하고 말았다. 말을 하고서야, 얻어 온 남편도 무안할 것 같고, 나도 머쓱해서, 제일 큰 머그컵에 껍질을 뜯고 뜨거워진 난로 위의 주전자를 들고 와서 물을 부었다. "와 말린 오렌지가 들어있네, 색이 예쁘네." 그런 말을 혼잣말처럼 하며 괜스레 티백만 두어 번 흔들어댔다.

남편도 이런 차는 처음 본다며 말린 과일이 들어있으니 굉장히 럭셔리해 보인다고 웃는다.


뜨거운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일은 신기하게도 온몸을 녹인다. 그리고 나의 예상과는 다른 이 맛들은 함부로 지껄인 내 입을 때려주게 한다. 솔직히 믹스커피 파인 나에게 이런 차들은 다 거기서 거기였는데, 오렌지 자몽 블랙티는 쓰레기통에 버린 봉지를 꺼내 사진을 찍게 만들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 자리에서 쿠팡으로 주문을 해버렸다. 




나는 제법 사납게 생겼다. 지금이야 아줌마가 다 되었으니 좀 둥글둥글해졌지만 젊을 때는 오해도 꽤 많이 받곤 했다.

삼십 대 초반 두 번째로 옮긴 학교의 2월 말이었다. 배정받은 학급에 미리 나가 환경미화를 하느라고 교실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글루건으로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복도에서 여자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더니 우리 교실 앞문에 두 명의 여자아이가 빼꼼히 머리를 내밀고 안을 들여다봤다. 나는 그때 집중하느라고 아이들이 앞문에 서 있는 줄 몰랐는데,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헉, 야 너 어떡해."

뭘 어떡해? 고개를 들고 아이들을 바라봤는데, 한 명은 옆 친구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그 친구는 울상이 되어 있다가 황급히 도망을 갔다.

뭐지? 쟤네들 뭐지? 곰곰 생각해 보니, 우리 반에 배정된 아이가 학교에 놀러 왔다가 무섭게 생긴 내 모습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 정도인가? 싶어 기분이 꽤나 안 좋았지만, 뭐 늘 그렇듯이 3월만 지나면 우리 반은 조금 개판이 되곤 하고, 아이들은 내가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걸 간파한다. 

이게 교사로서 조금 좋을 때도 있다. 사실 교사들 사이에서 첫날의 아우라를 강하게 가지고 가려고 마스카라를 세게 칠한다, 천서진처럼 입는다, 첫날은 절대 웃지 않는다 등의 매뉴얼이 전해지곤 하는데, 나는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강한 아우라를 뽐낼 수 있다.(이건 고학년 및 중고등에서 더 잘 먹힌다. 초등 저학년은 사실 역효과다. 저학년은 많이 웃어줘야 한다. 볼에 경련이 날만큼)


나는 그때 아이들에게 오렌지 자몽 블랙티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첫인상이 정말 별로인데, 어쩔 수 없이 마실 수밖에 없는 것. 그래서 호불호가 강력하게 갈리는 그런 차 말이다.


한 학년에 두 반밖에 없는 학교에서 근무할 때에는 옆 반 동료와만 소통해야 해서 꽤나 편하기도, 불편하기도 했다. 처음에 차선배는 무척이나 불편한 동료였다. 그녀는 굉장히 이지적으로 생겼고 잘 웃지 않았다. 하지만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서인지 우리는 금세 육아맘으로 하나 된 마음이 되었고, 방과 후에 아이들 이야기하다가 같이 눈물바다가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무슨 말만 하면 글썽이던 차선배의 모습은 귀엽고 짠했다.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며 오류를 범하는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사람을 사귀는데 취약하다.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과묵한 성격 탓이 크다고 보지만, 나의 외향에서 풍겨오는 것들이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오렌지 자몽 블랙티를 좋아한다. 첫맛은 시큼하고, 텁텁한데, 아래에 가라앉은 가루는 무척이나 달콤하다. 그래서 나도 오렌지 자몽 블랙티 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텁텁한 첫맛에 떨어져 나가도 좋다. 끝까지 마셔봐야 달콤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할 때, 첫맛에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좋은 사람을 잃어버리는 방법이다. 나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에게도 애면글면할 필요는 없다. 

끝까지 마셔봤는데, 호불호가 갈리면 불호와는 안녕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을 때도 있다.


믹스커피에 질린 날은 오렌지 자몽 블랙티를 꺼내 머그컵 가득 뜨거운 물을 붓는다. 오랜만에 마시는 차는 여전히 향긋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