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책장 Jan 24. 2023

양말 예찬

양말을 좋아한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종아리 중간까지 올라오는 장목을 선호한다. 양말을 쫙 끌어당겨 발과 발목을 감싸주면 마음까지 감싸 안아지는 듯한 포근함을 느낀다.

양말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딱히 없다. 그냥 늘 양말을 신어야 했다. 외출할 때 외출복을 입듯이 양말을 신지 않은 발로는 외출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에는 양말을 신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다. 심지어 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은 발로 털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친다. 그게 멋의 표현일까. 나는 보기만 해도 발이 시리다. 

여름에는 쪼리를 신는 사람들의 발을 안보고 싶어도 보게 된다. 대부분 발바닥이 더럽다. 먼지가 묻어있다. 쪼리는 발바닥 부분이 얇아서 거리의 먼지를 다 쓸어 담는 느낌이다. 잠깐 외출할 때도 맨발로 나갔다 그냥 들어오는 남편의 발을 볼 때면 잔소리가 너무 하고 싶어 진다.


나는 근본적으로 발가락이 부끄럽다. 발가락을 내놓고 다니는 사람들은 불편하지 않을까 궁금하다.

발가락도 못생겼지만 뒤꿈치는 어떤가, 굳은살과 각질의 향연을 들키고 싶지 않다. 반들반들한 발 뒤꿈치를 가졌다면 나도 당당히 내놓고 다니고 싶을까, 생각해 보지만 아닌 것 같다. 발을 내놓고 다니는 건 속살을 드러내놓은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목을 감싸주는 목티를 즐겨 입고, 셔츠도 단추를 끝까지 잠가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양말을 꼭 신어야 함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고무줄이 늘어난 양말을 신고 나간 적이 있다. 걸을 때마다 운동화 뒤꿈치가 양말을 끌어당긴다. 점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양말은 종국에는 운동화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 지경이 되면 드디어 이 양말과 작별을 고한다.

결혼 전에 양말에 구멍이 나면 꿰매 신었는데, 나는 늘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무줄이 다소 늘어난, 신으면 발에 촥 감기는 맛이 다소 떨어진 양말도 아쉽지만 신고 다녔다.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릴 때 드디어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구멍은 막을 수 있지만 양말의 고무줄은 다시 넣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남편의 양말에 구멍이 나서 꿰매주었다. 남편은 꿰맨 양말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나를 엄청 비웃더니 신고 출근했다. 그는 구멍이 나면 버리는 게 응당 그것이 양말의 당연한 쓰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무줄이 늘어나야지만 쓰임이 다하는 것이었는데, 그에게는 구멍이었다. 사람마다 양말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양말은 알록달록할수록 좋다. 나에게는 노란색, 보라색, 초록색 양말이 있다.  알록달록한 양말은 신으면 기분이 몹시 좋다. 다리를 꼬고 앉았을 때 발목 위로 바지 끝자락이 살짝 올라가고 그 아래로 드러나는 노란색 양말의 자태라니. 이때 정강이의 살이 보이면 안 된다. 그래서 장목양말을 꼭 신는 거다.

알록달록한 양말을 신고 가면 가끔 듣는 말이 있다. "쌤 양말 센스 있으신대요?"

물론 이건 비웃음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대부분 나와 같은 양말 센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안다. 내 취향은 무척이나 독특하다. 그래도 여전히 쿠팡에는 장목양말 노란색, 초록색, 주황색을 판매한다. 수요가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 양말시장의 한 자리라고 믿는다.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이 어딘가에서 알록달록 양말을 구매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직장에서 한 해가 끝나갈 때 양말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나와 동갑이었던 동료였는데, 그녀의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참으로 인상 깊었다. 두툼한 장목 양말 5켤레 세트를 선물로 주셨다. 검은색 두 켤레, 진초록 1켤레, 회색 1켤레, 남색 1켤레. 색깔은 무난했지만 내가 평소에 양말을 꼭 신고 다니며, 알록달록한 양말을 잘 신는 걸 아시고 본인 양말 살 때 내 것도 같이 샀다며 건넸다. 나는 어떤 선물보다도 감동을 받고 말았다. 누구에게나 쉽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나의 취향을 발견해 준 것에 대한 깊은 감동이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의 표현 중에서 내가 가장 따뜻하게 간직하는 기억 중 하나이다.


겨울에는 수면 양말을 신고 집안을 돌아다닌다. 저녁에 보면 발바닥에 개털이 가득 붙어있다. 벗어던지고 새로운 수면 양말을 꿰찬다. 양말을 신기 전에 바셀린을 듬뿍 발라 흡수시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루종일 종종 거린 나의 발에 가득 퍼져있는 굳은살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다.

아무리 양말을 챙겨 신어도 세월은 속일 수 없는지, 해가 갈수록 발은 거칠어지고 발바닥에 통증도 생긴다. 

그래도 또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고무줄이 짱짱한 양말을 쫙 끌어올려 신고 부엌으로 가 식구들을 먹일 쌀을 씻고 국을 끓인다.

마치 달리기 선수나, 수영선수들이 몸에 딱 맞는 경기복을 입듯이 나는 쫀쫀한 고무줄의 탄력을 느껴야 하루가 개운하다. 삶은 스포츠와 닮아서 또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함을 은연중에 느끼게 해주는 무언의 압력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나를 사랑하는 한 걸음을 위해 올해는 고무줄이 늘어난 양말을 다 버리고 짱짱한 예쁜 양말을 나에게 선물해야겠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동상이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