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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Feb 03. 2023

계단을 걷는다

이웃을 상상하기

픽사 베이


요즘 급하지 않을 때에는 엘리베이터 대신에 계단을 이용하고 있다. 

처음에는 무릎이 아팠는데, 이제는 요령이 생겼는지 무릎도 괜찮고 숨도 덜 찬다. 아직 이렇다 할 몸무게의 변화나 체력의 상승은 못 느끼겠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뭐라도 좋겠지 생각하고 실천 중이다. 

외출해야 할 일이 있을 때도 급하지 않으면 계단을 이용하지만, 글을 쓰다가 막히는 순간에도 외투하나 걸치고 복도로 나간다. 1층까지 갔다가 우리 집이 있는 13층까지 한 번 올라온 후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신기하게도 다시 써지는 순간이 있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듯, 매번 그렇지는 않다.


직장에서는 늘 계단을 이용한다. 학교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보통 짐을 이용할 때나 몸이 불편할 때만 이용하는데 그 많은 학생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교사라고 그걸 이용하면 학생 보기 미안해서 그냥 계단으로 다니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교실이 5층에 있는 해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1층에서 5층을 오가곤 한다. 행정실 갔다가, 교무실 갔다가 교실 갔다가 또 교무실 갔다가. 그런 생활을 몇 년씩 해도 절대 살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계단을 이용해서 살을 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쉬지 않고 올라왔을 때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조금만 더 가면 집이야 계속 가,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그 느낌이 꽤 괜찮다. 


가끔은 1층까지 갔다가 충동적으로 현관밖으로 나가보기도 한다.

찬 바람이 불면 다시 들어오면 그만이고, 햇살이 좋은 날에는 그대로 단지를 한 바퀴 돈다.

그럴 때는 나만 산책하는 것이 미안해, 집에 있는 초코 생각이 난다. 그 녀석도 산책을 좀 해야 하는데, 생각은 하지만 다시 들어가 녀석을 끌고 나오기에는 햇살이 너무 아까워서 잠시 망설인다.

그렇게 햇볕을 쬐고 다시 계단으로 걸어 올라올 때,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602호를 지날 때다. 그 집에는 앙칼진 강아지가 살고 있는데 복도를 지나다가 헛기침이라도 하면 캉캉 짖어대는 소리가 그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내준다. 602호 견공께서 짖기 시작하면 601호에서는 낑낑대며 현관을 긁는 발톱소리가 다다다닥 들린다. 6층에는 이렇게 성격 다른 견공들이 살고 있다. 우리 집에 살고 있는 초코를 한 번 더 생각나게 해 주며 개를 키운다는 유대감을 혼자나마 느낀다.


1002호에는 예스24 택배가 자주 와 있다. 다독가이신게 틀림없다. 박스는 항상 작은 사이즈, 아마 3~4권 정도 들어가는 크기이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책 택배를 보면 상자 안에 무슨 책이 들어있을지 항상 궁금해 참을 수가 없다. 택배가 빨리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아마 다들 일하러 나가시는 맞벌이 가정인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건 아내 쪽일까 남편 쪽일까.


502호는 공용공간에 물건이 가장 많이 나와있는 세대이다. 심지어 안 쓰는 박스들과 안 쓰는 화분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사실 소방법상 공용공간에는 개인 물건을 내놓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래도 소화전을 가리지는 않고 있으니 그나마 양심은 있지 않나 싶다. 

이런 말을 하기는 나도 찔리는 게 우리 집 현관 앞에도 자전거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내 자전거는 자전거 거치대에 보관하고 있지만, 자기 물건이 너무나도 소중한 우리집 작은 사람은 그곳에 두었다가 누가 훔쳐가거나 더러워질까 봐 꼭 끌고 올라오고 싶어 한다.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자전거를 처분하고 거치대에 놓을 수 있는 자전거로 바꿔줘야겠다고 생각한다.


공용공간의 깨끗함을 생각하면 801호와 802호를 빼놓을 수 없다. 같은 층에 사는 가족분들이 이렇게 성향까지도 비슷할 수 있을지 신기하고 재미있다. 8층을 지날 때면 우리 집 앞 복도를 더욱 정리 하게 된다. 

그런데 8층에는 특히 내 관심을 사로잡는 이가 살고 계신다. 이사오던 여름에 안방 창문을 열어 놓으면 아래 세대에서 담배냄새가 유입되곤 했다. 그래서 그 해 여름, 매의 눈을 하고 담배 냄새가 나는 순간 창문을 열고 아래층을 확인하곤 했는데, 어느 날 담배 연기가 솔솔 올라오는 층수를 포착했을 때 아무래도 8층 같았다. 내려다보는 채로 층수를 세기가 어려워서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략 7,8,9층 중에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경비실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탁을 드렸으나,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그 후로 나는 8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아저씨들을 티 나지 않게 째려보곤 했는데, 작년 여름부터는 담배 연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이사를 간 건지, 안방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는 행동을 멈추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최근에서야 나는 계단을 통해 8층의 복도 모습을 자세히 보게 되었고, 이렇게 깔끔한 복도를 유지하며 이웃집을 배려하는 분들이라면 안방에서 담배를 태울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선입견으로 인해 그동안 8층 아저씨를 째려봤던 것은 사실이므로 혼자서 반성하고 혼자서 사과도 해본다.


체력을 위해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지만 모르던 이웃들의 사생활을 관찰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밖에 나와 있는 유모차, 자전거 등을 통해서 이 집에는 몇 살 정도의 가족구성원이 함께 사는구나 알게 되기도 하고, 그동안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서 같은 라인에 어떤 사람이 사는 줄도 잘 모르고 지냈던 것을 반성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가끔 중간에서 타는 분들을 보면 '아 저분이 7층분이시구나. 아기가 있는 걸 보니 유모차가 나와있던 701호겠네.' 하며 유모차 주인인 아기가 괜히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심각한 내향인이기 때문에 여러 층에 걸친 모든 이웃들과 알고 지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용기는 그나마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는 일뿐이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수줍은 인사지만 나는 그 분들을 보며 그 복도를 떠올린다.


이렇게 복도의 물건들을 보면서 그 주인들의 성향이 어떤지 상상하고, 결국에는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구나, 안심하게 되는 시간들이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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