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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Feb 02. 2023

빡치기는 이상해

박치기가 맞아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 중에 직업병을 앓는 사람들이 있는데, 같은 직업이라도 그 병의 형태가 종종 다르게 나타나곤 한다. 사십 년간 모범생 프레임에 갇혀 살면서 초등교사인 나는 험한 말, 은어, 비속어 등에 민감한 편이다.


"선생님 철수가 저보고 아나떡거래요."

"아나떡거가 뭐야?"

"아나 너는 떡이나 먹어라 거지야."

말을 창조하는 능력도 능력이다 철수야.

친구에게 거지라는 말을 한 죄, 철수 혼남.


"선생님 어제 아빠가 현질 해줬다요."

현... 현질? 현질이라는 말이 왠지 저급하게 느껴진 건 나의 고정관념인가요. 아버님...


자기가 청소년인 줄 아는 어린이들 중에는 일부러 쎈 느낌의 용어를 사용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정말 몰라서 사용하는 친구들이 더 많다.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인 말들 중에 욕은 아닌 저급한 느낌의 단어들은 나에게 반감을 준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 날짜를 잡았던 시절에 그는 주말이면 나와 부모님이 함께 살던 우리 집에 종종 놀러 왔다. 그 겨울에 새언니가 둘째를 출산했다. 그래서 첫째 조카가 우리 집에서 한 달 동안 지내고 있었다.

막 세 살이 된 조카는 당시 우리 남편을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다.

그는 어린 아기와도 무척 잘 놀아주던 재미있는 아저씨였다.


어느 날 조카와 놀던 남편의 입에서 갑자기 욕 같은 게 튀어나와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나야 아저씨랑 빡치기할까. 이거 빡치기야 빡치기하면 아야 해."

빡. 치. 기?

빡친다는 말은 건달들의 입에서나 나오는, 가족들과 있을 때는 절대 쓰면 안 되는 금지어 같은 은어 아니었나. 그런데 결혼할 여자의 집에서 빡친다는 말을 너무 대놓고 사용하는 남자를 보고 기겁을 했다.

그때는 남편에게 말을 함부 하지 않을 때라서(지금은 함부로 한다)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하고, 나는 에둘러 잘못을 지적했다.

"유나 박치기하면 아파요. 박치기하지 마요."

일부러 박치기라는 말이 잘 들리게 또박또박 발음을 했는데, 그는 내 의중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빡치기. 빡치기"거렸다.

굉장히 신경 쓰였고, 부모님 보기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날 그에게 빡치기는 이상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 이후에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도 머리를 부딪혀서 우는 아이에게 "빡치기 했어? 아빠가 호해 줄게."따위의 빡치기스러운 말을 자주 썼다.

왜 빡치기가 이상하다는 걸 못 느낄까.


마치 "이 사건은 그 비극의 시발점이었다."라고 말할 때 시발점은 표준어인데, 그걸 듣고 욕을 떠올리는 이상한 상황처럼, 그래서 내가 이상한 건가 싶어서 사전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빡치기가 표준어라는 근거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물론 사투리라는 근거도 없었다.


이거 뭐 조카 십팔색 크레파스도 아니고 빡치기가 나를 빡치게 만들었다.


한 번만 더 빡치기거리면 무조건 고쳐주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며칠 전 드디어 그가 아이들에게 "아빠가 빡치기 한다."라며 장난을 걸고 있는 걸 포착했다.

나는 밑도 끝도 없이 소리를 빽 질렀다.

"빡치기라고 하지 마!"

갑자기 소리 지르는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박치기가 맞아."라고 소심하게 웃으며 정정해 줬다.

그는 "빡치기가 왜. 북 치기 빡 치기 북 치기 빡 치기" 이딴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는 따라 해봤다. "북 치기 빡 치기? 이상하잖아. 누가 북 치기 빡 치기 그래, 북 치기 박 치기지. 해봐."

머쓱해하는 표정의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아. 이거 내가 예민한 거야 뭐야. 십 년 동안 참고 살다가 드디어 터트려서 시원은 한데, 밑도 닦지 않고 화장실을 나온 기분이다.


나는 혼자 십 년 동안 빡치기 트라우마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빡치기가 편안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일언반구도 없이 빡치기 아니야! 라며 소리를 빡 지르니 황당할 법도 하다.



참고 기다리는 게 능사는 아닌 것 같다. 눈치를 줘도 눈치껏 알아먹는 사람이 있지만 남편이라는 존재는 그럴 확률이 적다. 

처음부터 내가 "박치기라고 해줘. 사투리야? 다른 사투리는 괜찮은데 빡치기는 왠지 거슬려. 욕 같아서 듣기 거북해." 라고 말해줬더라면 그도 기분이 많이 상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세월이 쌓이면 기분 나쁨도 쌓이게 마련이다. 나중에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만 봐도 빡치는 사이가 되지 않도록 오늘도 남편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야겠다.



덧, 맞춤법 검사하는데 브런치가 빡치기를 "화나기"로 계속 수정하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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