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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Feb 05. 2023

겨울눈 같은 우리

근사하다

2021년 12월 일터에서 발견한 목련나무 겨울눈이다


요즘 나무에서 겨울눈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년 봄에 분명 꽃을 피웠을 텐데 겨울에 보는 나무는 무슨 나무인지 잘 모르겠다. 겨울눈만 보고 나무의 이름을 알아낼 만큼의 지식도 없고, 최소한 꽃이 피어야지만 대충 이건 목련이고, 이건 벚꽃인지 안다.

같은 나무에서 자라나는 꽃들도 겉으로는 이렇게 다들 비슷하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크기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재미있다.

겨울눈은 가지 끝이나 중간에 매달려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가지만 앙상한 나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예쁠 거라고 기대하면 예쁘게 보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을 사귀는 일이 더욱 어렵다.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야 일로 엮여 있으니 엮인 동안은 무난하게 잘 지내지만 그 인연이 끝나면 더 오래 붙잡아지지 않는다.

그래도 간혹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H가 그렇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사실 반감이 살짝 있었다. 말이 너무 많았고, 약간 호들갑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다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항상 폭풍 칭찬을 해주는 모습에 마음이 점점 열렸다. 나에게 배울 점이 많다며 오늘도 이러이러한 점을 느꼈다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의 장점을 너무나도 잘 발견해서 그걸 꼭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어느 날은 아이들이 입다가 작아진 옷을 한 보따리 싸와서 혹시 필요한지 물어보았다.

입던 옷 같지 않게 정갈하게 빨래되어 각이 잘 잡혀 있었고, 신던 신발도 밑창까지 깨끗하게 세탁이 되어 있었다. 일하면서 아이옷을 어떻게 이렇게 깔끔히 세탁하고 정리할 수 있는지 감탄을 했다.

나는 아이들 옷이든 어른 옷이든 색깔 구분도 없이 한 번에 때려 넣고 세탁기를 돌려버리는 스타일이라서 아이들이 험하게 입은 옷은 아무리 빨아도 깨끗하게 유지를 못한다. 호들갑스러운 평소의 행동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살림을 해내는 그녀를 보고 사람은 역시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나는 꽃을 보면 H 생각이 난다. 어느 날 그녀가 네이버 스토어에서 꽃배달을 보내줬다. 정기배송으로 꽃을 받아본다는 그녀는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소녀 같은 감성을 지녔다.

그래서 나도 어느 날 프리지어를 배송해 드렸고, 답례로 그녀는 튤립을 보내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꽃을 보내주는 플라워 메이트가 되었다.


그래서 겨울철 길가에 서있는 나무의 겨울눈을 보면서도 그녀를 떠올렸다.

꽃도 모르고, 칭찬을 건네는 말에 인색했던 내가 그녀 덕분에 사소함이 주는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칭찬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이라니, 얼마나 근사한가.




겨울눈 속에는 봄이 되면 피어날 생명이 겨울을 이겨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겨울눈이 다 활짝 피어나는 것은 아니다. 피기 전에 죽어버리거나, 누군가에 의해 짓밟히기도 한다.

나는 어떤 겨울눈을 가지고 있을까. 마흔이 넘었으니 이제는 져버릴 일만 남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서글프니까, 우리 모두에게 겨울눈이 있다고 믿고 싶다.

꽃도 봄에 피거나 여름에 피거나 가을에 피어나기도 하고 때론 겨울에 싹을 틔우는 아이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에는 겨울눈이 또 맺힌다.


겨울눈은 겨울눈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에 맺혀 있는 수백 개의 겨울눈들이 모여서 봄에 화려한 군락을 이루는 꽃무리가 될 것이니까.

같은 나무에서 자라더라도 작년의 꽃과 올해의 꽃은 서로 다르다. 나무도 나이가 먹는 만큼 꽃잎도 성숙해지는 걸까. 아니다. 이겨내지 못한 겨울눈 속의 꽃잎은 작년의 그것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근사함으로 인해 나까지도 영향을 받아, 꽃의 군락을 이루고 싶다. 그러려면 나부터 근사한 사람이 되어야겠지만 말이다.

내 곁의 모두는 우리의 겨울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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