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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Feb 06. 2023

타인의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

방법은 없다

얼마 전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맛보는 아웃백이라 집밥만 먹어대던 나는 너무 신이 났다. 우리는 구석에 자리 잡고 신나게 수다 삼매경으로 빠져들었다. 

아웃백의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비치는 테이블에서는 스테이크와 파스타, 샐러드 접시를 가운데로 몰아놓고 여자들의 포크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직장 이야기, 남편 이야기, 그리고 명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시댁이야기가 주된 화제였다. 


내 옆에 앉은 A는 결혼한 지 5년이 되어가는데 아직 아이가 없다.

나는 A의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있는 스테이크를 한 조각 집어서 A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그녀는 "고마워." 하며 스테이크를 한입에 집어넣고 그 큰 눈을 반달로 만들었다. 참 예쁜 친구다. 같이 어디를 가면 꼭 남자들이 한 번이라도 말을 거는 친구. 말을 걸지 않아도 남자들의 눈빛은 늘 그 친구에게 머물곤 했다. 그렇게 예쁜 아이인데 이상하게도 거의 연애다운 연애를 한 번도 한 적 없이 삼십 대가 되어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녀가 남편 될 사람을 처음 소개해 준 자리가 떠오른다. 

훤칠한 키, 잘생겼다고 밖에 설명하기 힘든 이목구비.

"A야, 너 남자 얼굴 보느라고 연애 못한 거였구나."

나는 그녀가 그렇게 잘 살 줄 알았다. 

늘 진중하고, 말수도 많지 않고 남을 잘 배려하는 친구니까. 


원래도 별로 말이 없는 아이였지만 그날은 더욱 말이 없었다.

그때 다른 친구가 A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 부모님 하고 같이 사는 거야?"

"응. 엄마밥 먹고 살지. 너무 좋아."

응?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나만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거야?

"왜? 남편 어디 갔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보았는데, 순간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나 말실수한 건가.

"나 이혼했잖아."

"이혼했어? 나 몰랐어. 아이고, 언제. 힘들었겠네."

차마 왜 이혼했느냐고는 묻지 못했고, 이 분위기 어쩔 거냐는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나는 A의 등을 쓸어내렸다. 

"아니, 이제 괜찮아.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지금은 진짜 괜찮아졌어."

"아니야, 힘들었지. 괜찮겠어. 힘들었지. 아이고 힘들었겠어."

나는 횡설수설해 댔고, 그녀는 말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지만 내가 너무 소원했나 싶어 미안하기도 했고, 힘들었을 동안에 단 한 번도 연락을 하거나 밥 한번 사주지 못했던 내가 한심하기도 한,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밀려들어왔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원래 나는 말주변이 없는데, 그래서 그런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횡설수설하게 된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랬나, 후회가 밀려왔다.

힘들지 않다는 친구에게 내가 뭔데 '아니야, 힘들었지. 힘들겠지.'라는 말을 남발했는지. 입을 꿰매어버리고 싶었다.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일을 겪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2년 전에 B의 남편 부고 소식을 들었다. 사십 대 초반인 그는 직장에서 쓰러졌는데, 그대로 심정지가 왔다고 한다. 코로나로 한창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잘 가지 않을 때였다. 주말이었지만 남편이 집에 오지 않는 날이라서 나는 아이들을 다 데리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같이 알고 지내는 친구들 중에 그녀의 장례식장에 간 친구는 3명이었다. 다들 스케줄이 있으니, 다 맞춰 가지는 못했고, 한 명은 전날 밤에, 나는 다음날 낮에 갔다. 같이 연락하는 친구들은 많았는데, 나머지 친구들은 단톡방에서 가겠다는 말도, 안 가겠다는 말도, 부의금을 전달해 달라는 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보통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을 더 챙겨야 한다는 통념이 있지 않나. 

나는 코로나 시국이지만 아이들을 데리고서라도 장례식장에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상황이 아닌, 남편의 부고라는 뜻밖의 상황에서 B에게 위로를 건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장례식장에 가지 않은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

그날 장례식장에서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B에게 나도 아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기만 했을 뿐이다. 

장례식장에 가지 않은 친구들은 어떤 식으로 B에게 위로를 전했을까. 때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위로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 말을 하고, 어디까지 말을 아껴야 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남편이 죽고 없어지면 어떠한지, 이혼을 할 때 겪었을 수많은 감정의 싸움에서 어떻게 버텨야 할지 나는 겪어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다. 설령 겪어 본 슬픔이라 해도 타인에게 나의 경험을 공유한다고 위로가 될까. 




나는 십 년 전에 출산하고 중환자실에 아이를 보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를 잃었다.

아이를 잃은 사람들은 주변에 많이 없다. 아니 내 주변에는 한 명도 없다. 

친구들은 그때 나에게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 있을 때는 전화를 주던 친구들조차도 아이가 떠난 후에는 아무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마 자식을 잃은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을 거라고 이해한다.


내가 생각할 수도 없는 큰 슬픔을 겪은 사람에게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대체로 말로는 위로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냥 안아주거나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내가 아이를 잃었을 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라는 존재 덕분이었다. 같이 끌어안고 꺽꺽 울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서.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위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불편하다. 이혼이라는 상처를 안은 친구에게 나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다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겪는 상처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위로해 줄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까, 타인의 불행에 오히려 너무 빠져드는 것이 상처를 후벼 파는 일일 수도 있다.


나에게 달려와서 손이라도 한 번 잡아준 친구가 없었다는 것이 새삼 생각나며, 우리는 모두 미숙하니까. 자식을 잃는 일 따위를 겪는 사람은 잘 없으니까, 위로의 방법을 몰랐던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아마 내 친구들은 아무 말 없는 것으로 위로를 건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슬플 때 아무 말 없이 그냥 누군가가 달려와서 안아주면 좋겠다. 손을 잡아주고 등을 쓸어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쓸데없는 말은 아끼고, 등을 쓸어주고 껴안아 줄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고 싶은 위로의 형태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나 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싶다.


살면서 더 이상 위로할 일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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