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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지 질문에 대한 기획자의 대답

미리 알았다면 피하고 싶었던 날들

2024년 8월 17일 양천생활문화센터에서 진행될 <어느 특별한 예사로움>의 첫 번째 세션에서는 예사로운 크리틱(에세이)을 작성하고 예사로운 드로잉을 창작하려고 합니다. 오래간만에 에세이를 작성할 아빠들을 대상으로 Ice breaking용으로 10개의 질문을 정리해 보았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진로를 발견한 것, 커리어의 시작 (이게 중요한 일이라면 작성, 중요하지 않으면 패스…)  

    배우자와의 첫 만남  

    배우자와의 인상 깊은 이벤트 (데이트, 사건, 힘들었던 순간 등)  

    청혼, 약혼, 결혼   

    아이의 임신 소식, 10개월 간의 기다림  

    아이의 출산과 관련된 해프닝

    아이의 100일, 아이의 돌  

    아이가 엄청 아팠던 순간  

    아이로 인해 가장 행복했던 순간  

    아이가 나에게 주는 가장 큰 행복 (존재에 관련한 행복감)



너무 가정에 치우친 질문들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각자의 가정이 특별하다'라는 주제이기 때문에 가정과 아이에 대한 질문들로 구성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대체적으로 가정이 소중하다는 것은 관용구처럼 알고 있지요. 가정과 아이에 대한 각종 공익광고물을 보면 '소중한 가정'이라는 수식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하다'라는 수식어는 쉽게 찾아볼 수 없죠. 가정이라는 조직은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인식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정이 사회를 이루기 위한 이미 주어진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도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먼저 손글씨로 작성해보았는데 정말 손목이 아프고 진땀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순종 악필이라는 점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1번 질문부터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쓰다보니 분량이 길어졌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1. 진로를 발견한 것, 커리어의 시작

저는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장래희망칸에 큐레이터라고 기입했습니다. 큐레이터가 무엇을 하는 직업인지 구체적으로 잘 몰랐지만 막연히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수능을 마치고 상경계로 대학을 진학했지만 때마침 제가 다니던 대학교에 미술사학 전공이 있어서 복수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미술사학 일반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수료한 후 큐레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고3 때 장래희망을 직업으로 이어갔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예전부터 달성가능한 목표만 세워서 성취했던 현실파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미술 실기를 하기엔 늦었고 이론이라면 공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2. 배우자와의 첫 만남

저는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되었던 오르세미술관 전을 진행하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거래처 신입사원이었던 남편은 간이 안 좋은 사람처럼 어딘가 아파 보였습니다. 다크서클이 굉장히 심했고 눈빛도 초췌했습니다. 첫 만남의 장소는 인천공항 화물터미널이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도착한 오르세미술관 소장품이 담긴 크레이트를 반출하기 위해 화물 터미널에서 만난 것이었죠. 저는 약 한 달간 야근을 한 터라 다리도 퉁퉁 붓고 얼굴도 누랬습니다. 야근 많이 하면 귀도 잘 안 들리는 거 아시나요? 남편이 저에게 업무에 관련하여 질문을 여러 개 했다는데, 제가 대답을 굉장히 느리게 해서 남편 또한 제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본인이 대답하고 싶을 때 말하는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네?' 이것이 저의 첫인상이었던 거죠. 저희는 처음부터 바닥의 외모를 서로에게 선보이며 기대치 없이 인간대 인간으로 알아갔습니다. 로맨스는 없었죠. 오로지 다크서클과 부은 다리만 있었을 뿐입니다.


2014년 오르세미술관전 포스터




3. 배우자와의 인상 깊은 이벤트

전 남친인 현 남편은 직장인 밴드에서 신디사이저를 담당했던 저의 합주 시간을 늘 기다려주었습니다. 홍대 근방의 합주실에서 보통 일주일에 한 번씩 2-3시간의 연습을 했습니다. 그 시절 남편은 당시에 홍대역 근방에 위치했던 '콤마'라는 북카페에서 절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이 사람과 살고 보니 저희 남편은 누군가를 기다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름 엄청난 노력을 한 것이었죠.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아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4. 청혼, 약혼, 결혼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굉장히 현실에 발을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혼식은 애당초 하기 싫었습니다. 제가 원래 모든 '식'을 싫어합니다. 입학식, 졸업식, 결혼식 그리고 돌잔치까지.... 공주가 아닌데 공주처럼 꾸미고 사람들 앞을 행진하는 것이 싫었어요. 그러나 지금껏 뿌린 축의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양가 부모님의 의견을 존중하여 결혼식을 아주 작게 그리고 저렴하게 해치웠습니다. 8월 말에 결혼식을 올리면 당시에는 대관비도 없고 꽃장식 값도 안 내고 식대비까지 할인받는다고 해서 8월 22일에 결혼식을 올렸고 저는 그날 더위를 먹었습니다. 폐백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멀미를 한 것이지요.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으며 가까스로 집에 도착했어요. 대관비가 공짜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사진 촬영을 할 즈음에 식장에서 에어컨을 껐더라고요. 중국산 폴리에스테르 100%의 20만 원짜리 온몸을 옥죄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었던 저는 속이 울렁거리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습니다. 지금 보니까 궁상이 따로 없네요. 대신 신혼여행에 예산을 몰빵 했습니다. 남편과 이태리, 오스트리아, 체코 등지를 배낭여행을 했습니다. 호텔은 그간 출장을 다니며 모은 호텔스닷컴 마일리지를 활용해 좋은 곳을 잡았습니다. 하도 걸어 다녀서 물집이 생겼는데 만약을 위해 가져갔던 바늘로 터트리며 계속 걷고 또 걸었습니다.



5. 아이의 임신 소식과 10개월 간의 기다림

결혼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소중한 저희 첫째 시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석촌호수에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때라 야근도 많이 하고 석촌호수 근방도 많이 걸으며 시후를 기다렸습니다. 시후의 태명은 Flash였어요. 당시 DC Comics의 영웅 중 한 명인 Flash의 TV 시리즈 <The Flash>가 방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잘생긴 주인공이 너무 좋아서 '그래 아들아, 태어나는 김에 미남으로 태어나라'라는 마음으로 Flash로 태명을 붙였더니 양가 부모님들은 각자의 발음대로 태명을 부르셨어요. 후레쉬, 프레쉬 등으로요.


The Flash의 주인공역을 맡았던 Grant Gustin




6. 아이의 출산과 관련된 해프닝

많이 걸으면 순산한다고 하더니 저는 다니던 산부인과의 기록을 세우며 6시간 만에 초고속 출산을 했습니다. '초산인데 이렇게 애를 빨리 낳았어요?'라며 당시 병원에서 근무하셨던 간호사 선생님들이 저를 구경 오셨어요. 산부인과의 모든 간호사 선생님들을 다 만나봤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도 초산이라 뭐가 먼지 몰랐는데 지금 돌아보니 정말 초고속 출산을 했더라고요. 출산 후 퇴원하려고 하는데 병원 소속의 소아청소년과 선생님께서 아이에게 심잡음이 들린다고 100일 정도가 되면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하셨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요. 내가 그동안 야근을 많이 해서 아이에게 해를 끼친 건가 수십 번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퇴원을 했습니다. 작고 소중한 예쁜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을 자고 있었어요. 예쁘고 순수해 보였던 그 표정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7.  아이의 100일, 아이의 돌

시후가 100일이 되었을 때 저희 집 근처에 위치한 이대목동병원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에 가서 첫 진료를 보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이의 심잡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인터넷에 찾아보니 아이들의 심잡음은 뱃속에서 혈관이 다 닫히지 않고 태어나서 들리기도 한다라는 말도 많았고 아이가 커가면서 없어졌다는 후기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원로급의 임상경험이 풍부하신 교수님께 진료를 받았는데 교수님은 "이 아이는 무조건 심장 수술을 해야 해요. 돌까지 지켜는 보겠지만 시술로 되지 않을 것 같아요."라고 하셨죠.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는 고작 태어난 지 100일인데 수술이라뇨. 시술도 아니고. 교수님을 원망하면서 병원 문을 나왔습니다.



8. 아이가 엄청 아팠던 순간

결국 저희 시후는 26개월에 서울대학교 어린이 병원에서 총 12시간에 걸친 심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첫 9시간의 수술과 그 뒤 경과가 좋지 않아 3시간에 걸친 재수술을 받았어요. 아이를 오전 8:30에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실로 보냈는데, 아기가 그 다음 날 새벽 1시에 최종적으로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나왔어요. 첫 수술 뒤에 과다출혈과 심정지가 왔고 저희 부부의 동의서도 받지 않고 급하게 바로 재수술을 했습니다. 아이의 심정시 상태는 저희 부부가 첫 면회를 들어간 그 순간 일어났어요. 기저귀를 가져다주러 지정된 면회시간에 중환자실에 들어갔는데 아이 옆에는 수술을 담당하셨던 교수님께서 눈이 쾡한 상태로 아이 곁에 앉아계셨어요. 아이의 안색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교수님 곁에 계셨던 간호사 선생님께서 "도와주세요!"라고 다급하게 소리쳐 외치셨고 모든 의료진들이 시후에게 달려갔습니다. 저희 부부는 쫓겨나다시피 중환자실에서 나왔습니다. 그날 저희 아이로 인해 중환자실 저녁 면회는 일찍 종료 되었습니다. 수술 동의서는 수술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인턴 선생님이 받으러 오셨어요.


"어머님, 놀래셨죠? 저희도 너무 급박해서 사인을 먼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저희가 오늘 밤에 잘 지켜볼 예정입니다."


그날 지옥을 수없이 많이 오갔습니다. 심정지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인터넷 뉴스에서나 듣던 심정지가 우리 아이에게 온 것인가 싶었어요. 남편은 콘크리트로 된 병원 벽을 주먹으로 치며 울었고 저도 울고 싶었지만 가족 중 한 명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화장실 세면대에서 찬물을 틀어 손을 벅벅 씻었어요. 의료진은 심정지로 인해 뇌손상의 가능성을 두었지만 다행히도 뇌손상은 오지 않았어요. 그날 아침 8시 30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밤을 새워 아이 곁을 지켜주신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 중환자실 의료진과 소아 흉부외과 곽재건 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9. 아이로 인해 행복했던 순간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 입원은 저희 가족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은 전국에서 아픈 아이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처음에 이 병원을 방문하면 깜짝 놀라서 그날 밤 잠이 잘 오지 않았어요. 그러다 자주가게 되었고 입원까지 하게 되면서 아픈 아이들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에 익숙해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병중에 있는 아이들에게 방긋 웃으며 안부를 묻게 되더라고요. 아이들은 아무리 아프고 혹은 기형의 모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나름 귀엽고 예쁜 모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중에 있는 아이를 돌보다 보면 부모는 자연스럽게 겸손해집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로 배려하게 됩니다. 지금 뒤돌아보면 당시 심장 수술을 여러 번 했던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그 누구보다 강하신 분들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 아이가 심정지가 와서 재수술에 들어가서 망연자실해 있을 때 저희에게 음료수를 건네주신 어떤 어머님이 계세요. 이 분도 중환자실 보호자실에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그 어머님은 저에게 음료수를 주시면서 "애기 엄마, 힘내, 우리 아들은 심장 이식 수술을 하다가 40분의 이벤트가 왔는데, 기계에 연결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괜찮았어. 애기도 괜찮을꺼야 힘내."

저희는 심장 수술을 한번 하고도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는데, 6번, 8번의 수술과 아이의 고통을 함께 감당해 내신 부모님들에게 응원과 존경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요. 그분들로 부터 삶을 사는 태도를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이제는 건강해진 시후 @주문진 해수욕장




10. 아이가 나에게 주는 가장 큰 행복

저는 아픈 아이를 키웠다 보니 아이가 수술 후 건강해지니까 세상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행복감을 느낀 것 같아요. 아이가 심장 수술 전에는 순환이 잘 안 되어서 변비가 정말 심했는데 심장 수술을 하고 나니 가장 먼저 변비가 없어지더라고요. 응가 타임에 아이도 울고 저도 진땀을 빼던 일상의 순간이 쾌변으로 변하니 정말이지 편하고 좋았습니다. 시후는 수술 후 잘 회복하여 지금까지 잘 커오고 있습니다. 방긋 웃으며 걸음마를 했을 때, 젓가락질을 했을 때, 동생과 잘 놀아줄 때, 이런 일상의 예사로운 순간을 통해 기쁨을 선사해 주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매일 지각을 했는데 2학년이 되니 지각을 하지 않게 되었고 충치 치료도 거뜬히 잘 해내고 땀이 흠뻑 나게 뛰어놀며 지냅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저희 아이가 무엇하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 아이가 존재해서 저희 가족이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작년에 저희 아이들이 모두 폐렴에 걸려 이대목동병원에 입원했었어요. 둘째 딸아이가 아데노 바이러스가 심해져서 폐렴으로 먼저 입원을 했고 그리고 시후가 동생에게 옮아서 폐렴에 걸렸었습니다. 당시 소아응급실이 많이 없어지고 의료대란이었기 때문에 급하게 다시 이대목동병원에 전화를 걸어 입원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날 우연히도 시후의 심장을 처음 진료해주신 교수님이 당직이셔서 저희를 만나러 내려오셨습니다. 저는 폐렴이 심장에 영향을 미칠까봐 마음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심장 수술이 잘 되었다니 축하해요. 폐렴은 심장에 영향을 미치진 않아. 3-4일 병원에서 쉬다보면 애들은 회복할꺼에요. 어찌되었거나 해피엔딩이네!"


오늘 저의 개인적인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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