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같이 짙은 흑발의 마리-킴
마리-킴과 프랑수아는 루브르학교(L'École du Louvre) 석사과정의 한 수업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게 되었다. 마리-킴은 동아시아 고미술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프랑수아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인상주의를 연구했다. 박물관학 수업 시간에서 반 곱슬의 긴 흑발 머리를 하나로 동여매고 옅은 베이지색 셔츠를 즐겨 입었던 호리호리한 체격의 마리-킴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날, 프랑수아는 유심히 그녀를 관찰했다. 첫눈에 끌렸다기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마리-킴의 흑발과 짙은 검정 뿔테 안경은 매우 잘 어울렸고 무채색에 가까운 옅은 베이지색의 셔츠와 대비된 검정 뿔테 안경이 주는 인상은 강렬했다. 약간은 안경 뒤로 숨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둘의 전공분야는 아예 달랐기에 오직 박물관학 수업에서만 마리-킴과 프랑수아는 만날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만났다기보다는 그녀를 관찰할 수 있었다. 마리-킴은 강의실 맨 앞줄에 앉아 뒤를 잘 돌아보지 않았고 프랑수아는 그녀보다 몇 줄 뒤에 앉아 그녀를 관찰했다. 차가운 듯한 느낌의 칠흑같이 짙은 흑발은 아주 어두운 먹색에 푸른색 안료가 한 방울 떨어진 듯했고 무표정한 그녀의 표정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마리-킴의 시선은 늘 책에 가 있었는데, 박물관학 수업 전에는 복잡해 보이는 한자를 손으로 짚어가며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일까?
그녀를 두세 번 박물관학 수업에서 마주치고 프랑수아는 말을 걸어 보기로 다짐했다. 상대방을 향한 호기심을 계속 키워가는 것은 실례인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면 그녀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수업이 끝나고 그녀가 강의실을 황급히 빠져나가는 순간 프랑수아는 재빨리 마리-킴을 따라 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안녕하세요, 저기 잠깐 이야기할 수 있나요?”
“네? 저를요? 음… 다음 수업 시간까지 30분 정도 여유가 있어요.”
“아 네, 전 프랑수아라고 해요. 박물관학 수업을 같이 들어요. 그쪽은 늘 앞에 앉으시고 저는 주로 뒤에 앉아서 저를 처음 보았을 거예요”
순간 무표정해 보였던 마리-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뇨, 처음보진 않았어요. 강의실에 급하게 들어오는 모습을 종종 보긴 했어요. 아주 잠깐이지만 커피라도 한 잔 마실까요? 전 마리-킴이라고 해요.”
루브르 학교 내 카페테리아로 이동해 작은 2인용 원형 테이블에 앉아 마리-킴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던 프랑수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동아시아 미술 전공이신 가봐요? 늘 한자를 짚어가며 글을 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네, 저도 지금도 한자를 배워가며 글을 읽는 과정이라 독해가 빠르지는 않아요.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요.”
“어, 그러면, 아시아 쪽에서 유학을 온 게 아닌가 봐요. 전 막연히 중국이나 일본 출신의 유학생인 줄 알았어요.”
(잠시 머뭇거리며) “음…. 전 파리에서 계속 자랐어요. 한자는 동아시아 미술사 전공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한 4-5년 된 것 같아요. 아시아에서 유학 온 학생들 보다는 당연히 잘 못하겠죠?” (웃음)
마리-킴은 곁 눈짓으로 은색의 얇은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한 후 프랑수아에게 말을 건넨다. “제가 조금 있다가 일어나야 하는데, 다음 주엔 이 수업이 휴강이거든요. 박물관학 수업 끝나고 여기서 다시 만날까요? 저는 그쪽에 대해 질문을 제대로 한 것이 없네요. 다음 주에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요.”
마리-킴은 미소를 지으며 카페테리아 의자를 정리하며 일어선다. 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한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마리-킴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지며 프랑수아는 생각한다.
‘파리에서 계속 자랐다면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한 주간 시간이 지나고 약속대로 마리-킴과 프랑수아는 박물관학 수업이 끝나고 다시 교내 카페테리아에서 만났다. 그날도 역시 마리-킴은 옅은 색 베이지색 셔츠를 입고 있다. 흑발과 정말 잘 어울리는 옅은 베이지 색이다. 베이지색의 채도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도 답답해 보였을 텐데, 딱 적절한 농도의 차분해 보이는 베이지 색이다. 마리-킴은 프랑수아를 향해 싱긋 웃으며 검은색 뿔테 안경을 검지 손으로 추켜올리며 말을 건넨다.
“프랑수아, 잘 지냈어요? 오늘은 강의실에 급하게 안 들어오던 데요?”
(웃으며) “아 네, 오늘은 급하게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여유 있게 들어왔어요. 보셨나 보네요.”
“네네, 어딘가 급해 보이던 모습이 늘 인상적이었거든요. 프랑수아는 루브르 학교에서 뭘 전공해요?”
“전 19세기 후반 프랑스 인상주의와 연계된 사조들을 연구하고 있어요. 메인은 인상주의이긴 한데 전 나비파(Nabis)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나비파가 상징주의에 속하기 때문일까요? 해석의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 같아요.”
“네, 그렇군요. 저도 학부 때 인상주의와 나비파에 대해 간략히 배우긴 했어요. 일본 목판화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평면적이잖아요. 컬러풀한 평면성이 매력적이죠. 이국적이잖아요?”
이국적이라는 단어를 쓰는 마리-킴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프랑수아는 마리-킴은 이국적임과 파리지엔의 중간에 걸쳐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너무나 프랑스적인 무드를 가진 마리-킴이 가진 흑발이 이국적으로 느껴진다.
“아 그런데 마리-킴, 프랑스에서 태어났어요? 파리에서 줄곧 자랐다고 했잖아요.”
(미소를 지으며) “아니요, 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파리에서 계속 자랐어요. 사실 한국에 가본 적은 없어요. 지금의 부모님이 절 입양하시 거라서요.”
“아, 그랬군요. 제 질문이 너무 개인적인 것을 물어봤나요? 마음이 불편했다면 사과하고 싶어요.”
“아니요, 괜찮아요. 저는 자라면서 부모님과 다른 모습에 질문을 끝없이 많이 가졌던 것 같아요.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한국이라는 곳은 어딜까? 거기엔 무엇이 있을까?’ 이런 궁금증들이 저를 동아시아 미술사로 이끌어준 것 같아요.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 그랬군요. 그래서 한자를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한 것이군요.”
“네, 한자는 프랑스어랑은 정말 너무 달라서 어렵더라고요. 한국어에도 관심이 있긴 한데, 한국어는 또 한자랑은 전혀 다른 문자예요. 만약 한국에 여행을 갈 기회가 생기면 그때 간단한 회화라도 배우려고 해요.”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에 대해 설명해 가는 마리-킴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프랑수아는 자신이 가진 마리-킴의 첫인상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강렬한 느낌의 안경 뒤로 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나고 있었다.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프랑수아를 보며 마리-킴이 안경을 벗고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한다.
“프랑수아는 무엇을 좋아해요? 커피? 산책?”
검은색 뿔테 안경 아래에 숨겨져 있던 반짝이는 검은 두 눈동자가 그를 향해 웃고 있다. 순간 프랑수아는 그녀의 두 눈동자가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그녀의 흑발보다 더 깊은 아름다운 검은색이라고 느끼며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한다.
“네, 산책 좋아하죠. 그러면 나가서 학교 근처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에 같이 갈까요? 시간 괜찮아요?”
“네 그럼요, 저도 산책 좋아해요.”
카페테리아에서 나와 루브르 학교 근방에 위치한 튈르리 정원으로 이동한 두 사람은 6월 초여름 튈르리 정원에 만개한 라벤더 밭을 걷는다. 햇살은 따스하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은 싱그럽다. 은은하면서 향긋한 청량감이 배어져 나오는 연보라색 라벤더 밭의 향은 정원에 설치된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조각들과 잘 어울린다. 마치 고전주의 풍경화의 한 장면 같다.
마리-킴이 프랑수아를 지긋이 쳐다보며 말을 건넨다.
“프랑수아, 나비파를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나비파 작가 중에 누구를 제일 좋아해요?”
“아, 전 모리스 드니를 제일 좋아해요. 전반적으로 신비로운 분위기, 디테일을 숨기고 있는 듯한 배경, 오묘한 색상들과 여러 모티브들의 조합이 아름다운 것 같아요. 나중에 모리스 드니에 대해 연구해서 결과물을 내보고 싶은데, 그게 전시이든, 책이 든요. 그런데 제 뜻대로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모리스 드니
세 가지 측면에서 본 이본 르롤의 초상화(Portrait d'Yvonne Lerolle en trois aspects),
1897, 캔버스에 유채, 170*110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 Musée d’Orsay, Dist. RMN-Grand Palais / Patrice Schmidt
“모리스 드니의 어떤 점이 제일 좋은데요?”
“혹시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라는 작품을 아세요?”
“네,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 아니에요? 얼마 전 오르세 미술관에서 열렸던 <빛의 하모니> 전시에서 보고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림의 배경도, 주인공인 마르트의 눈빛도, 마르트가 착용한 앞치마도, 그리고 악보도 아름답고 어딘가 한마디로 단정 지을 수 없게 신비하죠.”
“맞아요! 저도 그런 점에 매혹되었어요. 모리스 드니의 그림은 말 그대로 한 마디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신비함이 묻어져 있죠. 그래서 좀 더 그림을 더 잘 관찰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뭐, 마네, 모네 등 유명한 화가보다 문헌 자료가 적은 것도 신비함을 배가시키는 것 같고요.”
모리스 드니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Le Menuet de la Princesse Maleine)
1891, 캔버스에 유채, 95*60 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 Musée d’Orsay, dist. RMN-Grand Palais / DR
“그림의 주인공이 마르트 맞죠? 모리스 드니의 부인이라고 들었어요.”
“맞아요. 모리스 드니는 당시 약혼녀였던 마르트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사랑의 확신을 가득 담아서 그림을 그렸다고 해요. 일기장에는 “사랑할 때 사람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사랑할 때의 태도는 쉽고 간결하고 동시에 인생은 소중해지고 신중해진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명언이죠?”
“모리스는 로맨티스트였나 봐요.”
“네네, 마르트를 굉장히 사랑했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해요. 이 작품은 마르트가 메테를링크 작가의 『멜렌 공주』 소설을 읽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라고 해요. 소설 내용 자체는 폭력적인데 역설적으로 그림은 너무나 평화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마르트를 향한 모리스 드니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요?”
마리-킴은 이렇게 말하는 프랑수아의 눈을 미소 지으며 바라본다. “프랑수아는 그림을 보면서 자신의 감정을 많이 이입시키나 봐요? 마치 자기 자신에 일어난 일처럼 말해요. 참 인상 깊어요. 반면에 전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거든요. 동아시아 고미술 전공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관찰할 때 오히려 그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디테일들이 보이거든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고미술은 무언가 침착하게 천천히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림이 그려진 종이 자체도 많이 변색되지 않았나요?”
“그럼요, 변색이 많이 되었죠. 종이 자체가 많이 약해져 있기 때문에 조도 조절도 세심하게 해야 해요. 괜히 빛을 세게 쐬었다가 작품이 더 손상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무언가 늘 조심조심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프랑수아는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하게 선택해서 말하는 마리-킴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다정하게 마리-킴을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이야기한다. “마리-킴, 주말에 그랑팔레(Grand Palais)[1]에서 진행하고 있는 <자포니즘(Japonisme)> 전시 보러 같 갈래요?
“오! 좋아요, 저도 그 전시 보고 싶었어요. 19세기말 인상주의에 영향을 많이 끼친 일본풍이잖아요. 반 고흐의 그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들었어요. 평면적인 화면 구성을 하고 원근법을 무시한 반 고흐 특유의 화면구성이 자포니즘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토요일 4시에 그랑팔레 매표소 앞에서 만날까요?”
튈르리 정원의 부드럽고 상쾌한 라벤더 향이 향긋하게 퍼지면서 프랑수아와 마리-킴을 감싼다. 연보라와 초록빛으로 물든 튈르리 정원 초여름의 에너지가 프랑수아 손 끝에 전달된다. 마리-킴의 연락처를 받고 인사를 하고 돌아선 프랑수아의 머릿속은 이내 토요일 저녁을 향해 가고 있다.
‘마리-킴이랑 어느 레스토랑을 가지?’
[1]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며 건립된 혁신적 건축양식의 건물로 현재는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 75008 Paris, Fr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