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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트와의 마지막 만남

한편 프랑수아는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의 복원과 관련한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있다. 전시의 홍보기사의 기본이 될 텍스트로 가능하면 이해하기 쉽고 대중의 흥미를 사로잡을 수 있는 내용으로 쓰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다. 몇 가지의 타이틀을 생각하며 워드 프로세서 파일에 적어본다. ‘1안: 다시 찾은 색채, 화려한 마젠타 빛의 향연으로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 ‘2안: 살아 숨 쉬는 그림, 모리스 드니의 대표작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3안: 오르세 미술관의 환영, 상징주의의 걸작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를 적어본다. 세 번째 제목은 가장 드라마틱하기에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이 용이하겠다고 생각한다. 다분히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이 담겨 있지만 사람들이 이를 알리는 만무 하다. 잔느가 왜 ‘환영’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냐고 물으면 복원을 통해 이전보다 생생해진 작품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환영이라는 단어로 상징적으로 묘사했다고 답변할 생각이다. 모리스 드니는 상장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그가 지고지순하게 사랑한 인생의 동반자이자 뮤즈의 초상을 그린 작품이니 걸작이라는 타이틀도 걸맞게 느껴졌다. 보도자료의 초안을 작성한 뒤 잔느에게 텍스트를 보여주자 그의 예상과 달리 잔느는 홍보기사의 타이틀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지 않는다.


“음, 보도자료 타이틀은 이 셋 중에서 홍보팀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걸로 고르면 될 것 같아. 나도 세 번째 제목이 마음에 들긴 해. 글쎄.... 좀 극적이지만. 드라마 제목 같기도 하고. 오페라의 유령이 떠오르기도 하고. 오히려 대중들은 좋아할 것 같은 제목이야.”


보도자료의 초안을 훑어보던 잔느는 코 끝에 걸쳐진 돋보기안경을 손가락으로 추켜 올리더니 프랑수아를 바라보며 보도자료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모리스 드니의 인용구를 추가하라는 피드백을 준다.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1900년 만국박람회에 관련된 것이든, 마르트에 관련된 것이든, 시대성이나 감정선에 있어서 현대인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요소를 찾아 추가하라는 것이다. 베테랑다운 잔느의 지적에 프랑수아도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인용구가 가장 적합할까?’ 프랑수아는 학예실 책장에 꽂혀 있는 모리스 드니의 회고전 도록과 나비파 도록을 뒤적거린다. 예상대로 도록에는 한 미술사조의 리더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모리스 드니의 인용구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 중 하나를 보도자료 초안에 추가하려던 프랑수아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생각에 빠진다. ‘마르트에게 하나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그녀의 이야기를 녹여 텍스트를 작성하면 더 좋을 텐데!’


프랑수아는 조용히 학예실을 빠져나와 지하 수장고를 향해 걸어간다. 지하 수장고를 향한 길에는 적막만이 감돈다. 한동안 자주 들렸던 복원실을 지나 미술관 지하 동쪽 끝에 위치한 수장고의 두껍고 육중한 철문을 열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수장고에 들어간다. 때마침 수장고에는 아무도 없다. 프랑수아는 제일 조도가 약한 조명을 켜고 작은 목소리로 마르트를 조심스럽게 불러본다. “마르트…” 마르트를 부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이상해 보이지만 개의치 않으며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오늘따라 마르트는 왜 나타나지 않는 걸까? 그녀는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을 때만 나타나는 존재인 걸까? 왠지 헛걸음을 쳤다는 생각에 등을 돌려 수장고를 나오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나지막하게 프랑수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프랑수아, 그냥 이렇게 가기야? 오래간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마르트는 그림 속의 모습처럼 여전히 아름답다.


“네, 잘 지냈어요. 요즘은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 복원에 관한 텍스트를 쓰고 있어요. 미술관 측에서는 이번 복원을 잘 알리고 싶나 봐요. 사람들은 복원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하고 신비한 감정을 가지고 있거든요. 원래 존재했던 작품이지만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그지,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맞지. 나도 나를 옥죄고 있었던 누런 바니쉬가 사라지니까 숨쉬기가 훨씬 좋더라고. 숨통이 탁 트인다고 해야 하나?”


“마르트가 그렇게 느꼈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얼마 전에 보도자료의 초안은 작성했어요. 타이틀은 ‘오르세 미술관의 환영, 상징주의의 걸작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에요. 어때요? 재미있죠?”


“하하, 환영이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귀신인 줄 알겠어?”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제목을 뽑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사실 너무 생생하게 복원이 되어서 죽었다 다시 살아난 느낌이 조금 나기는 하잖아요. 약간은 환영 같은 느낌이죠.”


“맞아, 거의 다시 태어났지. 예전의 나의 모습처럼. 1891년대의 나의 모습 말이야. 정말 고마워. 그림을 그린 모리스도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정말 기뻐할 거야. 지금도 아뜰리에에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던 모리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모리스는 나를 그림 속에 남겨주었고 그는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는 이제 만날 방법이 없어. 마음속으로만 그를 그리워할 수밖에.”


마르트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듣던 프랑수아는 모리스 드니는 마르트에게 어떤 사람이었냐고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해 마르트는 “음…”하며 생각을 가다듬은 뒤 말을 이어간다. “나는 모리스를 위해 종종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어. 드뷔시의 피아노 곡을 즐겨서 쳤지. 그는 음악을 좋아했거든. 내가 모리스를 위해 연주하는 곡을 그는 특별히 좋아했었지. 그래서 <말렌 공주의 미뉴에트>가 탄생하게 된 거야. 악보 표지에 그려진 여자 보이지? 먼가 흐르듯이 그려진 여자. 저 여자 또한 나를 묘사한 모습이야. 모리스는 한 캔버스에 나의 모습을 여러 개 그리곤 했지. 내가 가진 여러 가지 면들을 한 화폭에 담고 싶어 했어. 언제나 넘치는 사랑을 주면서도 더 큰 사랑을 꿈꿔왔던 사람 같아.”





모리스 드니

약혼자 마르트의 세 개의 초상(Triple portrait de Marthe fiancée), 1892
 Saint-Germain-en-Laye, Musée Municipal en dépôt au Musée départemental Maurice Denis, Le Prieuré, Saint-Germain-en-Laye © DR



모리스 드니

자화상(Self-portrait)

1916, 캔버스에 유채, 80 x 68 cm

Uffizi Gallery, Florence, Italy




프랑수아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모리스 드니와 마르트의 관계가 아티스트와 뮤즈의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해 왔지만 당사자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불현듯 자신과 마리-킴의 관계가 떠오른다. 마르트는 미소를 지으며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리스는 예술은 삶의 피난처이자 희망이라고 생각했어. 우리 삶에도 작지만 아름다운 순간들이 존재하는 것이 크나큰 위안이 된다고 말했지. 그래서 창작활동을 계속 이어간다고 말이야. 예술의 행위는 살아있는 꽃, 빛, 나무의 아름다운 균형, 바다 위의 넘실대는 파도처럼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어. 그는 생각이 참 멋있는 사람이야. 그렇지 [1]?”


“네 정말 맞아요. 모리스는 생각도 작품도 정말 멋있는 사람이었네요.”


“프랑수아, 이곳이 예전에 기차역이었다고 했지? 오르세 기차역. 나도 예전에 모리스와 함께 이 근처를 지나간 적이 있어. 1900년 만국 박람회 때 말이야. 그 당시 만국 박람회에는 프랑스 인상주의와 상징주의 예술에 헌정된 전시장이 있었지 [2]. 전시장은 너무나 멋있었고 모리스는 그 전시장을 정말 자랑스러워했어.

뿌듯함과 기쁨으로 물든 그의 벅찬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라. 당시 7개월간 진행된 만국박람회에 전 세계에서 몰려든 5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파리를 가득 채웠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옷을 입은 각국의 신사 숙녀들이 파리 거리에 즐비했어. 모리스가 파리 전역에 새로 생긴 건축물과 전 세계에서 온 전시품을 구경하자고 해서 그의 팔짱을 끼고 만국 박람회장 이곳저곳을 거닐었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야. 동양에서 온 다양한 나라들도 참가했었지. 그들의 이국적인 색채는 정말 환상적이었어. 모리스와 함께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어. 당시 프랑스 외교관이 동양에서 가져온 굉장히 오래된 책도 전시되었다고 해. 그때가 정말이지 가장 아름다운 벨 에포크의 시기였어.”





르 쁘띠 저널(신문): 1900년 만국 박람회 전경

Le Petit journal: 1900 Universal Exhibition, general view

H. Meyer and © Petit Palais / Roger-Viollet1900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프랑스 예술 전시 공식 카탈로그 삽화 [3]




“네, 맞아요. 모두가 그때를 그리워하죠. 파리의 진정한 전성기라고 말하곤 해요. 전 오르세 미술관이 기차역이었던 모습을 사진 자료로 봐서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은 상상이 잘 안 돼요. 기차가 정차하는 자리에는 지금 조각 작품들이 놓여있거든요.”


“그렇구나. 신기한 일이야. 나는 기차역으로서의 모습을 알고 프랑수아는 미술관으로서의 모습을 아는데, 우리가 지금 같은 공간에 있다니 놀라운 일이야. 그지? 내 삶을 돌아보건대 나는 모리스의 가족으로서 뮤즈로서 행복한 삶을 누렸어. 지금까지 그 행복한 삶이 이어져 오고 있으니 말이야. 그가 생각했던 인생의 아름다움을 나를 통해 표현해 준 것도 감사한 일이지.” 마르트는 미소를 지으며 지긋이 프랑수아를 바라본다. 그런데 갑자기 긴장이 되는지 마젠터 컬러의 플라워 패턴이 그려진 에이프런을 두 손으로 만지고 숨을 크게 고르고 이내 예상치 못한 작별 인사를 건넨다.


“프랑수아, 그동안 즐거웠어. 이제는 우리가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 복원도 끝났고 이제 전시가 시작되면 모리스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나를 많이 찾아올 것 같아. 나는 작품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고 프랑수아도 자신만의 삶이 있잖아? 환영 같은 존재인 나를 만날 이유가 더 이상 없지. 아쉽지만 환영의 안내는 여기까지야. 프랑수아도 모리스처럼 마리-킴에게 멋진 파트너가 되길 바랄게. 일방적으로 차고 넘치게 퍼주는 사랑은 없어. 그 사랑을 어떻게 주고받을 수 있냐가 관건이지. 그럼 잘 지내!”


마르트는 순식간에 저 너머의 공간으로 사라져 버렸다. 서서히 형체가 흐려진 것도 아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프랑수아는 허공을 바라보며 마르트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프랑수아의 목 안에서 메아리로 맴돌 뿐 밖으로 소리 내어 나오지 않는다. 당혹스러움과 허탈감에 프랑수아는 수장고 바닥에 놓인 팔레트 위에 잠시 앉아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을 되새겨 본다. 다리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한참을 가만히 있던 프랑수아는 생각이 정리 되었는지 곧이어 일어나 바지에 붙은 먼지를 털고 조명을 소등한 뒤 두꺼운 수장고의 철문을 잠근다. 한동안 전시 설치 전까지 수장고에 올 일은 없을 것 같다. 학예실로 향하는 프랑수아의 발길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마르트의 목소리를 통해 모리스의 삶과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인용구가 필요해서 마르트를 찾아온 프랑수아의 마음을 알았던 것처럼 마르트는 마지막까지 그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현실세계 너머의 공간으로 사라졌다.


프랑수아는 지하에서 올라와 미술관 1층 학예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마리-킴에게 문자를 보낸다. “오래간만에 샹젤리제에서 저녁을 먹는 것은 어때? 우리의 첫 데이트처럼 말이야!” 잠시 후 마리-킴에게 답장이 온다. “좋아, 6시에 코코하나?”



          







[1] 모리스 드니 작가 노트 참고, 1895년 3월 24일 자



[2]『오르세미술관 전, 인상주의, 그 빛을 넘어』, GNC Media, 2014, 오르세 미술관 수석 학예사 까롤린 마티유 에세이, p. 149



[3] 프랑스 국립 도서관 온라인 DB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4328343/f6.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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