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대문 안에 위치한 장소 중 가장 외국인 방문객이 많이 찾는 장소를 꼽으라면 바로 '경복궁'일 것입니다. 경복궁은 그만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지요. 외국인 뿐만 아니라 내국인들도 경복궁을 많이 찾습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회루와 웅장한 긍정전 그리고 궁궐 내부의 아름다운 조경은 바라보기만 해도 힐링이 됩니다. 저는 미술사 전공 대학원 마지막 학기 때 서촌에 있는 작은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을 했습니다. 경복궁 담장을 끼고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이 참 좋았습니다. 점심시간이면 고궁박물관쪽 출입구로 경복궁을 산책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 일을 하면 누릴 수 있는 호사였습니다. 가을이면 은행잎이 떨어져서 풍경화의 한 장면처럼 경복궁 담장의 회색과 은행잎의 노란색이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며 거리를 물들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소인 경복궁은 수차례 복원을 통해 조성된 장소입니다. 1990년부터 시작하여 2045년까지 복원 작업이 예정된 경복궁은 대한민국의 역사의 산증인으로 사회적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훼손을 겪었습니다. 현재 40대 이상의 분들은 중앙청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광화문 바로 뒤에 위치하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일제 식민지때 건설된 중앙총독부 중앙청은 경복궁을 시야에서 싹 가리며 북악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민족의 정기를 끊은 건물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저도 유년시절 중앙청 앞에서 찍은 사진이 몇 장 있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18세기 영조 때의 경복궁의 모습을 어떨까요? 저도 이 작품을 책에서 보고 저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어? 경복궁이 뭐 이래?'. 초가삼간같은 모습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경복궁의 모습을 겸재 정선은 덤덤하게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허물어진 담장에 소나무만 무성한 폐허에 가까운 아래의 장소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경복궁의 예전 모습입니다.
"경복궁,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삼청동 숲과 한양도성 언저리는 내 고향의 중요한 놀이터였다. 경복궁은 담장이 허술해서 아무데로나 드나들었다. 경복궁 마당에서 나는 또래들과 닭싸움, 말타기, 자치기, 깡통차기를 하며 놀았다. (중략) 그때 경복궁은 일제 때 헐리고 전쟁 때 그을린 모습 그대로의 폐허였다. 전각이 있던 자리에 주춧돌만 남았고, 흩어진 석재 사이에 풀이 돋아나서 메뚜기들이 뛰었다. 남아 있는 전각의 아궁이 속은 어둡고 축축했다. 거기에 찬바람이 드나들었고 오래전에 식은 재 냄새가 났다."[1]
위의 인용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출신인 '칼의 노래' 김훈 작가의 유년시절 경복궁에 대한 기억입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1948년생 김훈 작가의 기억이니 경복궁은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작의 시점에도 폐허로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시작은 태조 이성계와 함께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즉위한지 3년만에 한양 천도를 결심하고 법궁을 창건했습니다. 큰 복을 누리자는 의미의 경복궁은 조선시대에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입니다. 1395년 (태조 4년)에 완공한 경복궁은 아름다운 목조건물이었다고 합니다. 세종대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이곳에서 반포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그러나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5년동안 방치 되었다 19세기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이 되었습니다. 당시 7천여칸이라는 거대한 스케일로 중건이 되었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또다시 수천칸의 전각이 헐리고 중앙총독부의 중앙청이 궐내에 들어서는 등 훼손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36개의 건물만 남았습니다. 이 모습이 아마 제가 기억하는 경복궁의 최초의 모습일 것 같습니다. 중앙청 건물 뒤의 넓은 터에 위치한 몇 개의 건물들이 경복궁이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주로 중앙청 내부에 전시되어 있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을 관람하고 돌아왔지 경복궁 그 자체를 관람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았습니다. 경복궁은 1990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지금도 복원중입니다. 전해져내려오는 역사적인 사료를 기반으로 복원을 하고 있지만 복원이 잘못 되었다는 시시비비도 많습니다. 복원이 잘 못 된 점은 아쉽지만 그래도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는 노력은 인정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단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처음 중앙청을 허무는 계획이 나왔을 때 그래도 아픈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건물을 남겨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점이 되어 돌아보면, 그때 저 건물을 철거하길 참 잘 한 것 같습니다.
인왕산 자락 청운동에서 태어난 겸재 정선은 지방 현감을 지낸 시기을 제외하고는 어린시절부터 노년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종로구에 거주하며 폐허가 된 경복궁을 바라보며 살았을 것입니다. <경복궁>을 그릴 때 그의 나이는 79세로 종로구 옥인동 부근에서 거주하며 이곳에서 바라본 경복궁을 그렸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그린 폐허가 된 <경복궁>은 인생의 벗을 먼저 떠나보내고 세월의 수많은 환란을 겪어낸 녹녹치 않았던 겸재 정선의 삶이 투영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겸재 정선은 <경복궁>을 그릴 때 애써 아름답게 장식적인 요소를 더 하여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폐허 속에 남은 주춧돌, 불타버린 경회루의 흔적, 궁궐 뒤로 보이는 울창한 소나무 등 그 모습 그대로를 그렸습니다. 그나마 그림 속에서 제대로된 집의 형상을 하고 있는 곳은 경복궁을 지키는 군인들의 막사였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은 폐허가 된 궁궐은 간략하게 그리고 뒷편의 소나무를 미점으로 힘주어 표현함으로써 거의 방치되다 시피한 경복궁의 적막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단의 이미지들은 지금도 복원이 진행중인 경복궁의 사진들 입니다. 겸재 정선의 <경복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고 중앙청이 궐앞을 가로 막고 있었던 1990년대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정말 많은 모습이 변했습니다. 이제 제법 궁의 형태를 멋지게 갖춘 것 같습니다. 지나온 역사를 반추해보면 경복궁과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외침과 격변의 위기 속에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지만 지금은 멋진 모습으로 복원된 경복궁은 한국사와 닮아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것을 잘 지키는 것의 가치를 실천하는 시대가 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초등학생 아들을 키우면서 요즘 놀라는 것은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저학년의 교육과정에는 대한민국의 전통문화를 교육하는 내용이 굉장히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저보다 전통문화와 풍습에 해박한 모습을 발견할 때면 우리나라 교육도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음악시간에도 서양 가곡 위주로 노래를 많이 배웠던 것 같은데 아이는 민요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전통문화와 가치를 더 체화하여 잘 유지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뿌리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보존하고 관련된 콘텐츠를 잘 개발하는 것이 문화선진국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이 글은 이석우 교수님의 『겸재정선, 붓으로 조선을 그리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 페이지, KBS 뉴스 김석 기자님의 <그래도 겸재 정선은 그렸다. 경복궁의 폐허를… >[1], (2021.03.18 일자) 기사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