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자의 기억법 #14
카레는 그 고유의 아이덴티티가 무척이나 강한 음식 중 하나다. 양이니 닭이니 돼지니 혹은 비건이니 하는 부가적인 재료들에 따른 배리에이션이 꽤나 존재하지만 이들의 존재감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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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같이 확고한 경험칙을 비웃는 돌연변이들이 드물지만 존재한다. 스스로를 교수라 일컫는 이곳 주인장의 카레가 바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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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입자로 갈려 들어가 있는 새우와 조개와 굴이 뿜어내는 초식은 일말의 군더더기 없는 크리티컬을 자랑한다. 어느새 카레의 주도권은 온 데 간 데 없다. 갖가지 재료들을 발밑에 두고 호령하는 다른 카레들과 달리 이곳의 카레는 몰락해버린 구한말 양반들마냥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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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을 산산이 부수는 유쾌한 반란은 스스로의 일천한 미식 공력을 자각하고 다시금 반성의 자세를 다잡는 계기가 된다. 이렇듯 대관절 학습하게 되는 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