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구원 : 사무실을 벗어난 점심

일상에세이 16편

by forcalmness

요즘 점심시간의 미션은 사무실 벗어나기다. 따사로운 햇빛과 찬 바람이 공존하는 가을날, 사무실에서 꼼짝않고 점심을 때우고 책읽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볼까 생각도 하지만. 따사로운 햇빛과 살짝 데워진 듯한 찬 공기가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이긴다. 사무실 밖으로 나오세요. 햇빛과 공기가 부르는 소리에 화답하도록.




오늘의 목적지는 회사 근처 도서관이다. 아침에 오랜만에 여유로워 읽고픈 책리스트를 살피면서 도서관 사이트 검색에 들어갔다. 도서관에 보고픈 책이 대출가능으로 뜬다. 오늘 운이 좋다. 책 대출 신청을 해두고 점심시간에 찾으러 갈 생각에 웃음이 입술 사이로 삐져 나온다. 오늘 점심 코스를 머릿속으로 즐겁게 그려본다. 신청한 책을 빌리고, 도서관 꼭대기 층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해서 냠냠 홀짝, 조금만 더 읽으면 완독하는 책을 마저 다 읽고, 완독한 책 반납까지 야무지게 한 뒤 사무실로 복귀하면 미션 클리어. 점심 산책길 상상에 오전이 덩달아 가벼워진다.




참 신기한 게 사무실과 도서관은 걸어서 7분 거리, 길어야 10분 거리인데 공간을 벗어나면 다른 시간이 펼쳐진다. 벗어나야만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설 수 있다는 걸 요즘 절실히 느낀다.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며 멈춰있지 않기. 장소를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게 어쩐지 유한한 일상에 한줄기 빛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잘 가는 도서관 꼭대기층 카페엔 바 테이블이 있는데, 그곳에선 공원이 한눈에 보인다. 호수도 보이는 공원이라 더 아늑하고 편안하다. 공원 산책을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이 눈에 가장 먼저 띈다. 우리 귀염둥이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공원산책을 나서서 찍었던 사진 속 아이 얼굴이 떠오른다. 이어 양산을 나란히 쓰고 함께 산책 나온 중년 여성 세분이 눈에 들어온다. 쪼르르 양산을 머리 뒤로 쓰고 걸어가는데 그 모습에 왜 눈물이 찔끔 나는걸까.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을 만끽하러 나온 아쉬운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가는 시간을 잡지 못하는 진리가 갑자기 사무치는 걸까.




공원에서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을 도서관 카페에 앉아 고요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아주아주 야무지고도 찰지게 경량패딩을 걸치고서라도 점심시간엔 '사무실을 벗어난 점심'을 보내야겠다고. 난 사무실에서 일하려고 태어난 회사원이 결코 아니니.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원하는 대로 쓰고픈 욕망이 철철 흐르는, 뼛속부터 자유인이니까. 그걸 스스로에게 각인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고, 사무실을 벗어난 점심으로 그 각인을 행하길 명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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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조명 아래 앉아 있는 온전한 내 여유분인 점심시간이 스스로를 구원한다. 베이글에 차분히 크림치즈를 바르며 입안에 고이는 침을 느끼는 시간. 레몬얼그레이 스콘 조각이 조명 아래에서 만드는 그림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내 마음의 그림자도 이렇게 상상치 못한 울퉁불퉁한 그림일까 엉뚱한 생각을 해보는 시간. 어느 때보다 내 모습이 투명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깜깜한 밤에서 꺼내는 '투명한 구원'. 사무실을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가는 걸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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