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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라 와인 Oct 10. 2017

 두고 온 것들에 대하여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어, 오늘 한국에서 출발했던 거니?"

"네, 맞아요. 거의 20시간을 왔나 봐요."

"오...... 일단 쉬어, 일단 자, 여기 차를 둘께, 얼른 마시고 자, 내일 아침에 보자!"



밤이었다. 

밤일 줄은 알았으나, 진짜 밤이었다. 보름달이 떠오른 밤이었다. 

할 줄 아는 이탈리아 말이라고는 "Grazie" 밖에 없어 잔뜩 움츠린 마음으로 택시에 제일 큰 용량의 트렁크와 기내용 트렁크를 싣고 공항을 벗어나 도시로 들어왔다. 


결국 왔다, 진짜로, 이곳으로, 이탈리아 볼로냐. 


일본사람 같은 머리가 계속 신경 쓰인다, 파스타처럼 파마를 해야하나 싶다. 


몇 시간을 앉아있었던 건지, 
몇 잔의 와인을 마신 건지, 
지쳤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것은 확실하다. 

무슨 목적이 있었는지, 
목적이 필요했던 건지, 핑계가 필요했던 건지, 
지쳤다. 
하나의 장이 시작된 것은 확실하다.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를 봤다. 

까맣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스크바를 바라보며 도시의 불빛이 화산재처럼 보일 때까지, 도시를 지나 구름 위로 올라갈 때까지, 구름 위를 지나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손으로 반사빛을 가려가며 얼굴을 창에 가까이 댔다. 야경을 즐기기엔 그래도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두고 온 것이, 
USB 챙겼나, 운전면허 넣었던가. 
보내지 않은 메일이, 
리오더 하지 않았던 해외생산 스타일이 있었나, 캐시미어 902,903 리오더 메일을 보냈었나.
처리하지 않은 일이,
퇴직금 통장 해약되겠지, 통장사본 메일 받았겠지. 



"그래, 데려다주니까 우리도 마음이 편하다."

"응. 그러게."

"잘 다녀와." 

"응."

늘 그렇듯 대화가 이런 식이다. (이건 사실 내 문제다.)

"나는 걱정되는데, 쟤는 또 갈 생각에 신나나 봐."

아빠가 서운하듯이 말한다.

"우리나 걱정되지, 가서 적응하고 어쩌고 하면 또 정신없어서 연락도 잘 안 할 거야 아마."

엄마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실제로 뉴욕에서 세 번인가 엄마한테 전화한 게 전부였다. 그래서 이것도 사실 내 문제다.)  

"안녕, 다녀올게." 

앞서가는 감정을 잡아두기 위해 말을 자른다. 

출국심사장 앞에서 여권을 꺼내다가 뒤를 돌아본다, 아직도 그 자리에서 나를 배웅하는 엄마 아빠가 보인다. 

뒤따라오는 감정을 멀리 보내려 손을 흔들고 고개를 돌린다. 


심사 장 안으로 들어가 긴 줄을 대기한다.

좁은 틈 사이로 아빠 엄마의 뒷모습이 보인다. 

커지는 감정을 입을 꾹 다물며 잡아맨다. 



두고 온 것이 있었나, 

모든 것을 두고 왔다. 모든 것이 그곳에 있다. 

온통의 것들이 그곳에, 그리고 나는 이곳에 있다. 

멀어져 가는 도시를 마냥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비행기는 날아올랐고 나는 이미 이곳에 있다. 



아마도 거의 처음으로,

내가 두고 온 것들에 대해,

내가 두고 온 것이 있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한다. 


엄마, 연락 자주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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