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남미, 아프리카 등 낯선 인물 명칭이 등장하는 소설 읽는 법
그동안 살아오며 한 번쯤 읽어봐야겠다(하지만 평생 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는)고 생각한 외국소설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대부분 꽤나 알려진 유명한 소설일 것이며, 보통 그런 소설들은 빼곡한 글씨와 두툼한 두께에서부터 위압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연한 의지로 책을 손에 넣고 펼쳐봤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10페이지 또는 한 챕터 정도 읽었다가 덮었다고 치자. 그다음에 펼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안 봐도 뻔하다. 다시 책을 펼친 것은 하루나 이틀이 지나 서일 테고, 얼마 읽지도 않았던 앞부분에 나온 인물들의 이름조차 기억나질 않는다.
그리고 다시 읽어가며 등장하는 소설 속 인물들은 분명 앞장에서 봤던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간략한 특징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특히 러시아 문학을 필두로 유럽, 남미, 아프리카 문학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 길이. 이름만 길면 어떻게라도 외워보겠지만, 소설 속에서 때때로 2~3개의 별칭으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읽어갈수록 A, B, C...라는 인물들이 등장해 복잡한 사건들을 이뤄가지만 머릿속은 점점 헛갈리고 결국 좀 더 읽어 내려간다 해도 이야기의 맥락을 잡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읽고자 했던 소설의 결말은 알 수 없어도, 결연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독서의 결말은 알게 된다.
그 결말은 허무하게도 “이 소설은 재미없어” 또는 “이 소설은 내가 읽기에는 너무 어려운데...”와 같은 자기 위로와 함께 평생 읽지 못할 소설 리스트에 올라갈 것이다.
이런 불상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약간의 독서 보조장치가 필요하다. 생각보다 간단하다. 외국 소설을 읽기 전, 메모지와 볼펜을 준비해 두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될 때마다 이름을 적고, 그 옆에 인물의 특징에 대한 간단한 메모를 해두면 시작부터 끝까지 인물에 대한 특징을 비롯해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소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간략한 특징을 메모해둔 것이다. 물론 등장인물 전체를 기록하지는 않았다. 계속 반복해서 등장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 위주로 적어주기만 해도 충분하다.
읽다 보면 맥락상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영향력 없는 인물들도 있다. 이런 인물들은 메모지의 분량만 늘릴 뿐이니 과감하게 기록에서 생략해주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책은 등장인물의 이름만 적다 끝날 수도 있다.
-화자(나): 35세, 책을 통해 삶의 의미와 답을 얻고자 하는 모범생 스타일
-알렉시스 조르바: 60대 노인, 큰 키와 자유분방한 영혼,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
-디미트라키: 조르바의 첫아들(3살에 죽음)
-프로소: 조르바의 딸
-얀니: 조르바의 동생
-오르탕스 마담: 크레타섬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는 전직 창녀(과거 열강들의 장군들과 놀아나던 화려한 시절을 잊지 못하는 이)
-스타브리다키: '나'의 영혼의 동반자 같은 친구, 독립운동을 위해 떠남
-마브란도니: 크레타섬의 장로, '나'가 빌린 갈광탄의 소유주
-파블리: 마브란도니의 못난 아들로 아버지가 과부와의 결혼을 반대하자 비관해 자살함
-무스토요르기: '나'의 외조부
-아나그노스티 영감: 크레타섬 마을의 원로(농민)
-키리아마룰리아 할머니: 아나그노스티 영감의 부인
-마나스: 아나그노스티 영감의 손자
-미미코: 마을의 미친 소년
-카리얀니스: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는 '나'의 친구
-자하리아: 괴짜 수도승, 수도원 조직의 부패를 비판하는 인물
당장 실행해보고자 다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면 메모지가 없는데...라는 핑계가 하나둘씩 머리를 내민다. 꼭 정해진 메모지 어야만 할 이유가 없다. 주변에 있는 A4용지나 이면지, 때로는 계산 뒤 받은 영수증 뒷면, 냅킨 등에 적어도 된다. 다시 볼펜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면 핸드폰의 메모 기능을 활용해도 좋다. 의지만 있다면 적을 메모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등장인물의 메모를 통해 안전하게 독서를 마쳤다면 해당 메모는 버리지 말고 책갈피처럼 끼워두는 것이 좋다. 우리가 아무리 정독했다고 해도 며칠이 지나면 대략적인 줄거리와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잊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메모를 함께 보관해두면 소설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을 때 잠시 들여다보며 회상하기 쉽고, 다음에 다시 읽을 때 좀 더 속도감 있게 집중할 수 있다.
버킷리스트처럼 가슴에 새겨두고 아직 꺼내 들지 않았던 그 책을 당장 꺼내보자.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한 당신의 독서는 이처럼 약간의 보조장치만으로도 실현될 수 있다. 풀리지 않는 미로와 같이 느껴졌던 외국 소설과 그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낯선 이름이 친숙하게 느껴지며 더 깊이 작품과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