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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포 Nov 15. 2019

정답을 찾는 독서는 답답하다

작가의 손을 떠난 텍스트는 더 이상 작가의 소유가 아니다

유럽의 지하철에 타면 책 읽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이런 풍경을 찾아보기 힘들까? 


인터넷 속도와 스마트폰 보급률이 가장 높은 국가의 폐단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책과 멀어지게 된 이유를 굳이 자랑스러운 국가경쟁력에게 까지 뒤집어씌울 필요가 있을까. 


정작 우리가 책과 멀어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독서를 공부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독서는 공부의 반대 개념인 놀이와 더 가까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무슨 소리야?"하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학창 시절부터 독서를 공부로 배워온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다시 한번 밝혀두지만 독서는 공부와는 다르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른, 남남의 관계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좋아하던 시를 검색해보다 깜짝 놀랄만한 경험을 했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다가 조금 지나서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독서와 멀어진 이유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예전에 좋아했던 시 한 편이 떠올라 다시 읽어보고자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그 유명한 시, 백석의 '여승'말이다.


여승 女僧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 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마치 이등병 시절 백일 휴가를 나와 고향집 대문을 밀고 들어가기 직전처럼 가슴이 간질간질한 설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검색된 페이지를 열어보니 시에 대한 해석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고등학교 교과서 또는 모의고사 등에 이 시가 인용되는 모양이다. 


호기심에 내용을 자세히 보니, 시의 성격은 애상적, 감각적, 서사적이고 어조는 회상적이며 제재는 한 여자의 일생, 주제는 여승의 비극적 삶이라고 적혀있었다. 특징으로는 감각적 어휘의 구사와 비유가 돋보이는 점이라고 한다. 이런 핵심정리가 먼저 나오고 뒤에 시 전문이 나오는데, 그리 길지도 않은 시 곳곳에 빨간색 밑줄이 빼곡하게 쳐있었다. 


밑줄 친 곳에는 빨간색 글씨로 시의 단어나 문장마다 의미하는 바가 적혀있었다. 특히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라는 시구 옆에는 '청각의 촉각화(공감각)'라고 적혀 있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식으로 정리된 내용을 보며 생각해봤다. 이렇게 시를 배우고 소설을 배우는 문화 속에서 문학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우리가 그동안 가장 가깝게 접해왔던 책은 대부분 교과서다. 교과서는 말 그대로 학교의 교과 과정에 따라 교육의 재료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따라서 정확한 목적성을 지니고 분명한 범위와 한계를 드러내는 책이다. 이런 교과서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다. 


하지만 독서는 다르다. 독서는 정확한 목적성, 분명한 범위와 한계가 없는 책 읽기 과정이다. A라는 내용을 통해 A를 알아가는 공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독서는 A를 통해 B, C, 심지어 ㄱ, ㄴ까지 그 영역을 무한히 확장해가는 과정이다. 


앞서 소개한 시의 해석은 개인의 감상을 막는 정답을 제시한다. 이런 해석을 통해 시를 접한 학생들은 다음에 또 다른 시를 읽을 때 분명히 정답을 찾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시 읽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시와 멀어지는 강력한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 소설과 같은 문학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학창 시절 교육의 영향으로, 책을 읽을 때 반드시 정해진 정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작가가 의도한 해석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독서=공부'와 같이 생각한다는 증거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독서에는 정해진 정답,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사유의 과정에 누가 감히 정해진 답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문학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작가의 손을 떠난 텍스트는 더 이상 작가의 소유가 아니다'

그만큼 읽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환경이나 상황, 심리적 상태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해석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독서의 가장 큰 기능 중 하나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인데, 책에 대한 해석이 맞건 틀리건 뭐가 중요한가. 아니 그런 정답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정말 꾸준한 독서를 하고 싶다면 이제 확실히 알고 넘어가자. 우리가 읽는 책에는 그 어떤 정답도 없다는 것을. 오직 책과 그 책을 통해 느끼는 우리의 감정, 그리고 스스로 이어가는 사유만이 있을 뿐이다. 독서를 통해 생겨난 자신의 감정에 주목하지 못하고 정해진 정답을 찾고자 한다면 독서는 더 이상 즐거운 경험이 아닌 공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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